매거진 WAY2GO 영광

백일홍에 핀 여심

내마음의 백일홍 이야기

by Surelee 이정곤


영광에서 광주로 넘어가는 22번 국도.
난 그 길을 수없이 지나쳤지만 너무 익숙하고 평범해서 그런지, 내 눈길에 잡힌 것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밀재터널에 이르기 전까지 도로 양옆으로 핀 백일홍이 문득 나의 마음을 멈춰 세웠다.
한여름의 햇살을 고스란히 머금은 붉은 꽃들.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수수하지도 않은 채, 길가에 피어 우리를 환영하는 듯했다.
그 모습이 왠지 낯익었다.
마음속에 떠오른 두 이름.

현희, 그리고 재심.
삶의 고비마다 내게 힘이 되어준 고마운 두 친구.
겉으로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나는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오늘따라 그들은 백일홍 같다고 느꼈다.
소리없이 제 몫의 계절을 살아내고, 누구의 시선도 바라지 않으며, 다만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피어 있는 사람들이다.

현희는 삶을 직진으로 달려온 사람이다.
거칠고 험한 길에서도 한 번도 핸들을 놓지 않았다.
매 순간 선택 앞에서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했지만,
단 한 번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흔들리는 것 같아도 결국 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강인하고도 부드러운 그 모습이,
가로수 옆에서 버티며 피어 있는 백일홍과 꼭 닮았다.

재심도 비슷하다.
삶을 고요하게 다듬는 사람이다.
언제나 묵묵히 음식을 나누고, 사람을 챙기고, 말보다는 손끝으로 마음을 전하는데 부지런하다.
누군가의 상처를 드러내는 대신, 따뜻한 수건을 건내주는 그런 손길을 가졌다.
백일홍처럼 오래도록 피어 있는 것, 그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그녀는 안다.
그래서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살아간다.

나는 그 두 사람을 친구삼아 영광에서 네번째 여름을 훌쩍 넘어왔다.

내삶에 기운이 빠져나가고 어지러울수록 그들의 침묵은 반보 늦게 걷는 나에게 적당한 보폭이 되어주었고, 그들의 웃음은, 물이 흘러넘치는 항아리에 꽃잎 하나 띄어놓은 것처럼 내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 놓았다.
백일홍은 그리 주목받는 꽃이 아니다.
영광에선 상사화가 더 유명하고,
사람들은 늘 그 붉은 물결에 열광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오래 피어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현희와 재심은 그런 친구들이다.
나에게 말없이 말을 가르쳐주고, 내가 넘어질까봐 손을 먼저 내밀어준 친구들이다.
자신의 삶이 아무리 고단해도, 비록 침묵으로 말하지만, 그들의 눈빛에선 이미 나의 안부를 묻고 있다.
백일홍을 보며 그들이 떠오른 건, 아마 그 꽃이 두 여심을 닮아서일 것이다.
눈부신 여름에 피어 있지만
소란스럽지 않은 그 단정한 태도.
마치, “나 여기 있어.”라고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들.
나는 그런 친구를 가졌다.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백일홍을 보며 다시 깨달았다.

길고도 짧은 인생에서
그들은 내게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선물해주었다.

“세상엔 들리지 않아 더 아름다운 말이 있다.
세상엔 눈에 띄지 않아 더 깊은 꽃이 있다.”

올해 여름이 가기 전에, 나는 백일홍의 길 위에서 두 친구에게 한 송이씩 꽃을 전해 주고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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