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님의 열세 번째 편지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데 이 편지부터 씁니다.
선물님처럼요. 해야 할 일이 쌓여 있지만 손을 안 대고 있어요. 왜 그런지 내 마음을 샅샅이 알 수는 없지만 선물님이 왜 그런지는 알 수 있어요. 저도 딱 그 심정이거든요.
다 쓴 원고를 두고 몇 주가 아니라 거의 몇 달 째 투고도 안하고 가만히 두고 있어요. 투고를 해야 거절이라도 당할 텐데 퇴짜 맞기가 무지 싫은가 봐요. 쓸데없는 완벽주의가 가동되고 있는 지도 모르고요. 여하튼 그건 생각만 해도 약간 스트레스가 올라오니 당장 하고 싶은 일은 선물님께 편지를 쓰는 일이네요. 이 또한 약간의 의무감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의 가벼운 의무감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에요. 더구나 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누차 느끼고 있는 건데 이게 은근히 재미있어요.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글쓰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냥 내뱉는 글쓰기라서 그런가 봐요. 무슨 말을 지껄이든 어쨌든 선물님이 선물로 포장해서 들어주리라는 믿음도 한몫 하고요. 그래요, 늘 고마워요 선물님.
오늘도 커피를 마셨어요. 자꾸 마시다 보니 몸도 적응을 하나 봐요. 그렇게 싫은 티를 내지는 않네요. 심심한 아침 식사 후에 약간 자극적인 커피 한 모금. 쓰고 떫고 시고 탄내도 좀 나는 깊은 커피 향. 아침을 먹으면서 그 시간이 기다려지고 벌써 기분이 좋아지지요.
참고로 정말 금욕주의자처럼 사는 건 아니라고 덧붙여요. 누군가는 선물님의 글만 보고 제가 정말 그렇게 산다고 착각할까 봐요. 매일 식욕을 자제하려 하지만 저녁에 자극적인 음식이 들어가면 입이 터지고 말아요. 어제만 해도 아침에는 오이, 토마토, 사과 정도 먹고 점심에는 밥을 1/3 공기 정도 먹었는데 저녁에 대식을 하고 말았어요. 저녁 먹기 전에 먼저 애피타이저처럼 토마토와 고구마를 집어 먹었고요. 본 식사로 불고기와 함께 잡곡밥을 잘 먹었지요. 그러고 나서는 아이가 남긴 밥을 처리해야 한다고 거의 한 그릇을 다시 먹었어요. 우리 첫째는 원래도 밥을 많이 먹는 편인데 어제는 저녁 식사 전에 삼각김밥을 먹어서 자기 밥을 거의 남겼거든요. 다시 한 시간 뒤에는 우유에 건강 단백질 분말을 타서 초코 씨리얼을 말아 먹었어요. 그러고도 혀는 뭔가 탐닉하고 싶어 하더라고요. 그거 참 신기하죠. 안 먹을 때는 몇 시간을 안 먹어도 식탐이 안 느껴지는데 한번 혀가 가동되면 끊임없이 갈구해요. 아무리 먹어도 미뢰가 무언가 더 달라고 하는 느낌이에요. 도를 닦으려면 왜 수도원이나 절에 들어가야 하는지 이해가 돼요. 일단 자극이 주어진 상황에서 그걸 참는 인간은 정말 대단한 인간인 거 같아요. 담배 끊는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농담도 있는데 그 농담도 이해가 돼요. 원천적으로 담배와 차단이 되지 않는 한 엄청나게 독하지 않으면 금연은 불가능할 거 같아요. 저는 그냥 매일 시도하고 매일 실패하고 매일 또 다른 시도를 하는 한 인간입니다. 오. 이렇게 적고 보니 조금 마음이 가볍네요. 실패를 스스로 허용하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이게 선물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도 해요.
올해 제 가장 큰 바람이 있다면 ‘한 인간’으로 ‘그냥 인간답게’ 사는 것이에요. 그동안 너무 이상적인 생각만 하다가 삶의 많은 기회를 놓쳐 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포츠 중계에서 ‘통한의 역전골’ 같은 표현을 하는데 꼭 그런 느낌과 비슷해요. 생각과 말만 앞서고 실제 살지 못한 삶. 상처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삶을 떠올리면 눈물이 앞을 가로 막습니다. 엉엉. 어렸을 때는 왜 그렇게 무식했을까요? 그렇게 상처받지 않으려고 해 봐야 아무것도 안 되는데 차라리 상처를 받을 걸. 이렇게 쓰자마자 사실 두려움도 같이 올라오네요. 상처는 역시 싫은 거예요. 상처를 환영하는 인간은 정말로 강인한 인간입니다.
얼마 전에 SNS에서 봤는데 어떤 사람이 인스타그램에 ‘실패를 사랑합니다.’라고 써 놓았다고 하더라고요. ‘실패를 사랑하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사람이 어떻게 실패를 사랑할 수 있지!’라고 생각을 하다가 과장하자면 얼굴을 가슴에 파묻고 울고 싶었어요. 그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아니까요. 실패를 사랑하지 않고 어찌 성공을 하겠어요. 실패를 사랑하지 않고 무슨 도전을 하겠어요. 젊은 날의 제가 들었으면 몸 둘 바를 모르지 않았을까 싶어요. 괜찮은 척 안 괜찮았던 그 청춘.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느라 마음만 바빴던 그 청춘. 심장을 저격당한 듯 뜨끔했을 거예요. (이걸 상상할 수 있다는 건 지금도 그렇다는 소리죠.)
그런 면에서 선물님이 참 부럽기도 해요. 일단 몸을 써서 부딪쳐 보는 것. 미지를 향해 뛰어드는 선물님을 보고 있으면 제 가슴도 함께 설렌답니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는 거지? 차마 나는 그렇게 못하겠다.’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부럽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이쯤에서 심리학적인 자기 분석을 좀 하고 지나가야겠네요. 쓸데없이. 하지만 매우 진실하게. 은근슬쩍 넘어가 버릴 수도 있지만 그런 식으로 선물님께 미화되고 싶지 않고요. 나 자신을 속이고 좋은 사람인 척하고 싶지도 않고요. 무엇보다 아무 말이나 지금 당장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고 그걸 선물님이 들어주길 원해서요. 선물님과는 다르게 이기적이지요? 미안합니다만 정직하게 들어주세요. 선물님이랍시고 미화하지 말고 적나라하게 이야기해주세요. 선물님이 어떻게 듣고 다시 제게 넘겨주실지 몹시 궁금해지네요.
차마 그렇게 살지 못한 젊은 시절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생각을 해 보면요. 스스로 대단한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온 사람이에요. 꼰대들이 ‘내가 말이지, 왕년에’라고 하듯이 치기 어린 청춘은 ‘내가 말이야, 언젠가는’이라고 하고 다녔던 거예요. 지금은 내가 비록 폼이 좀 빠졌지만 과거에는 어땠다고 하는 거나 지금은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미래에는 어떨 거라고 하는 거나 그게 그거죠. 현실을 단단히 지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다 허상이지요. 허상에 취해서 살았던 그 청춘은 그래서 꼰대의 다른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무대의 배우들과 함께 극을 만들고 계시다고 했죠? 배우들이 다 제멋대로인 거 같아서 동분서주하며 피곤해하는 선물님의 모습이 그려졌어요. 사람들 조율하는 일에다가 사진 찍고 리플렛 만들랴 온갖 잡일도 병행해야 하는 것 같아서 참 선물님스럽다는 생각도 들어서 혼자 피식 웃었어요. 쉽지 않은 삶을 선택해서 애써 쉬지 않고 달리는 선물님, 어쩜 그 모습이 그렇게 한결 같을까요? 아마 그런 좌충우돌이 없으면 선물님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느끼기도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혼자서 조용히 글을 쓰고 싶다고 하셨지만 마음 저편에서는 사실 지금의 삶을 갈망하고 이루고 계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칼 융의 심층심리학에 따르자면 우리 안에는 나도 모르는 무의식의 인격들이 있잖아요. 선물님 본인은 아니라고 하는 삶을 살면서 실상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아니무스(여성의 깊은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성)가 자기실현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기도 모르게 계속해서 그렇게 살도록 선물님 자신을 이끌고 있는 희한한 힘이 내면에 있는 건은 아닌지. 그 힘이 의외로 선물님의 삶을 선물님답게 살도록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아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안아주고 함께 극을 완성해야겠다고 하신 그 마음 그대로 자기 안의 다양하고 낯선 마음들도 안아주면 어떨까요? (갑자기 진지하게 상담자 모드가 되어 미안합니다. 제 마음이 늘 선물님을 안아주려 준비되어 있다는 거 아시죠?)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지만 선물님과 함께 마신다면 그 향이 더욱 그윽할 거 같네요. 함께 앉아서 시간을 때우고 멍도 때리고 싶네요.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내 안의 못난 마음 잘난 마음 가감 없이 꺼내놓고 ‘한 인간’으로 우리 함께 존재해 보아요. 영월의 풍광에 커피가 다 식도록 아무 말이 없어도 좋아요. 지금의 나보다 잘나지 않아도 된다고 나에게 말하고, 지금의 현실 이상의 것조차 나에게 요구하지 않고 있을 수 있다면. 그걸 있는 그대로 봐 줄 수 있는 동무가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에요.
대전은 지금 봄비가 와요. 그곳도 비가 오나요? 그렇다면 우린 이미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사는 존재일 거예요. 이 봄비에 저의 가장 큰 바람을 실어 보냅니다.
선물님, 그냥 지금 이대로 있는 그대로 존재해 주세요.
2023. 4. 15 11:08 대전에서 상담사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