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작가의 열두번 째 편지
해야만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게 되네요.
보통 해야만 하는 일을 끝내놓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이기적인 거라 느껴 저 한쪽에 밀어두었다가 먼지가 쌓이고 왜 하고 싶은 걸 하지 않냐는 질문에 변명을 늘어놓기 일쑤였는데 말이죠.
써야만 하는 글과 작업이 쌓였는데, 당장 하지 않아도 되고, 제가 쓰고픈 답장부터 씁니다.
‘커피’도 ‘미꾸라지’도 소재와 주제와 표현이 감동이었어요! 봄날 아침 윤슬처럼 맑게 빛나는 느낌이었답니다! 그 반짝이는 물결에 저도 손을 담그고 싶어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마음을 두드리고 싶은 기분을 담아서요.
오늘 아침엔 조금 맛있는 커피를 마셨습니다. 나무님과 다르게 커피를 사랑하는 저는 바리스타가 과정도 이수했답니다. 원두, 로스팅, 커피를 내리는 다양한 방법 등을 알지만, 커피가 가장 맛있을 때는 마음 편히 좋아하는 사람과 마실 때, 가장 향이 좋을 때는 혼자 충분히 열정적이거나 감상적인 시간에 빠졌을 때 같아요.
원치 않는 친절이야말로 참 곤란하죠. 시골에 살면, 친절을 가장해 사생활의 담을 넘는 경우가 종종 생겨요. 도시는 우연히 만나기 힘들지만, 시골은 읍내 어디서든 만나게 돼요. 게다가 어느 카페를 가더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요. 카페가 몇 안 되는 데다가, 카페 주인이 누구의 딸, 누구의 누구 거든요. 지난 일주일은 특히 참견, 꼰대, 권위 같은 느낌이 드는 한 분으로 인해 너무 힘들었어요. 일에 집중할 땐 밥 먹는 시간이 불규칙하고, 밤늦게까지 일하고 오전에 자거나 밤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하거나, 컨디션에 따라 다른데 아침 여덟 시면 왜 안 일어났냐, 점심 먹으러 나와라, 등등…. 도시에선 바쁘다는 핑계나 정중한 말로 거리를 둘 수 있지만, 시골은 그렇지가 못해요.
그런데 오늘 오전에 만난 예순이 훌쩍 넘은 분은 저와 허물없는 친구라 느껴서 제 삶에 너무 과하게 참견한 것 같다고 먼저 말씀하셨어요. 사실 요즘엔 좋은 말만 하면서 표면적인 관계도 많은데, 진심 어린 말씀에 그간 다른 분들의 원치 않는 친절까지도 모두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더라고요. 보통 일 년 살이가 끝나간다고 느낄 때가 독립적인 제게 어른들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기 시작할 때인데, 연세 많으신 분과 친구처럼 앉아 마신 커피 한 잔으로 모든 게 너그러워지다니요. 봄 햇살도, 누군가와 이렇게 세대를 넘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참 따뜻한 아침이었어요.
다만 이야기에 빠져 오후 일정에 점심을 못 먹고 뛰어가야 했답니다. 어찌나 배가 고프던지 이것저것 간식을 먹다 보니 아예 밥을 먹는 게 나았을 정도로 엄청 먹었더라고요.
소식주의자, 1일 1식 같은 걸 시도하는 나무님이 참 대단해 보여요.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은 뭐든 성공할 수 있다고들 하는데요. 그 꾸준함, 나무님이 얘기한 강렬한 본능인 식욕을 억제할 수 있는 자제력이면 정말 뭘 해도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나무님은 자기개발서나 명상 서적을 읽고 마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를 꾸준히 실천해보더라고요. 저에겐 그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미꾸라지인 제게는 한결같이 단단한 뿌리를 땅에 박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릴 줄도 알고, 비가 오면 온몸으로 받아낼 줄도 알고, 눈이 오면 잠시 쉬어갈 줄도 아는 나무님이 참 든든하고 멋집니다. 가끔 가지 속에 숨겨진 미꾸라지에게 나뭇잎 달아 다녀오라고 인사해주세요. 이미 그 나뭇잎 타고 세상을 날아다니며 씨앗을 뿌리는 나무님이라고 느끼니 너무 근질근질 답답해하진 않으시길!
저에게 요즘 가장 바쁘게 해야만 하는 일은 극을 만드는 일입니다. 소설은 혼자 쓰고 고치고, 다른 책을 보다 쓰고 고치고, 자료 조사를 하기도 하지만 혼자가 참 편한 글쓰기입니다. 그에 비해 극작은 쓸 때는 혼자였지만, 쓰일 때는 절대 혼자가 아니에요.
일단 이 극작을 선택해 줄 연출이 필요합니다. 연출이 이 극을 이렇게, 저렇게 표현해보고 싶다는 결심이 들면 지금처럼 뮤지컬인 경우 작곡가와 음악 감독이 함께 합니다. 노래가 있으니 안무가도 필요하죠. 이것들을 무대에 펼쳐줄 배우들도 당연히 필요합니다. 극에 쓴 캐릭터에 맞는 배우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요즘 연기하려는 친구들이 많거든요. 하지만 실력도 있는데 캐릭터에 맞는 배우를 찾기는 좀 어렵습니다. 뮤지컬은 노래도 잘해야 하니 조건이 또 하나 붙습니다.
배우들이 연습에 들어가면 의상과 소품, 대도구 준비에 들어갑니다. 이것도 처음부터 만들어 놓을 수 없고 극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수정과 보완이 있다 보니 초연이 다가올수록 바빠집니다. 돈이 많으면 각각 감독이 따로 있겠지만, 늘 예산이 빠듯하니 있는 걸 뒤집니다. 대형극이면 음향이나 조명 감독이 따로 붙지만, 그 정도 대형극은 생각처럼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형극 광고를 쉽게 보고, 대형 뮤지컬을 많이 보아서 흔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보다 훨씬 많은 저예산 연극과 뮤지컬이 있습니다. 여하튼 동선에 맞춰 조명이 필요하고, 대본에 맞춘 음향도 필요합니다. 무대감독도 있으면 정말 좋겠지만, 돈이 없으면 어쩔 수 없죠. 그럴 때면 미술학원 선생님이 “넌 뭘 그리려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전 언어와 추리 지능이 높은 대신 색감이나 공간지각능력이 매우 떨어져서 무대를 보면 막막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짠, 하고 극이 올라가면 좋겠지만, 포스터와 리플렛도 만들어야 합니다. 홍보도 해야하고요. 리플렛에는 다양한 글과 정보, 배우들 사진도 찍어야 합니다. 이러는 중에 배우들 한 명, 한 명이 요구하거나 질문하기 시작하면 정신이 없어집니다. 제작진의 요구도 늘어납니다. 이게 됐는지, 저건 극장과 조율을 했는지, ….
분명 극단 대표이자 작가인데, 점점 제 역할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 주저앉고 싶을 때 제가 쓴 대사를 배우가 연기로 표현하거나, 연출이 분위기를 살려주거나, 작곡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면 그게 마약입니다.
이제 초연이 이 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아마 정신없이 바쁘겠지요. 사실 지금도 해야 할 일이 수두룩한데, 해야 할 일을 미루고 하고 싶은 답장을 쓰는 제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새벽 1시 7분.
정말 다 알지 못하는 인생, 알아가는 재미가 있으니 그 나름 인생의 즐거움이 되겠지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지만, 우리는 자신을 알아가는 ‘삶’이란 여정을 함께 가는 동지, 나무님!
목적이나 뜻을 같이 하는 ‘동지’, 많은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극’은 짧든 길든, 내용이 슬프든 재밌든, 함께 작품을 만들어 가는 동지면서도 입장이 참 다릅니다. 각자 자신을 알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일까요? 제작진은 전체 극이 잘 완성되어 관객과 만나는 게 최우선이라면, 출연진은 그 극 내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중요시한단 느낌이 듭니다. 어떤 배우들은 제작에도 힘을 보태려고 하지만, ‘돕는다’고 생각하고 출연진과 제작진 사이에 선을 긋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극은 결국 ‘관객’이 완성하는 상황예술인데, 왜 ‘동지’가 되지 못할까요? 안타깝습니다. 제가 좀 더 그 사이를 오가며 함께 가도록 해야하는데, 제작진과 출연진 모두에게 선물이 되지 못하고 있던 것 같아요. 다시 힘을 내야겠어요!
스타벅스처럼 개인이 다양한 옵션을 선택해서 딱, 손에 쥐어주면 좋은데 함께 합을 맞추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 자신의 옵션을 포기해야 할 일도 생기고, 누군가의 옵션을 부러워할 일도 생깁니다. 그래도 모카, 카푸치노, 에스프레소, 룽고... 모두 베이스가 커피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좋을 텐데요.
저부터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을 살짝 내려놓아야겠습니다. 혼자만의 시간보다 함께 완성해가는 시간을 이 주 정도는 더 소중히 여겨야겠어요. 자기 자신도 다 모르는데, 서로가 서로를 어찌 다 알겠어요. 그러니 더 넓은 마음으로, 두 팔을 벌려 바람을 맞이해 볼까 봐요.
최선을 다해 있는 그대로 상대를 안아주면서요.
이제 나무님과 커피를 마주 앉아 마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굉장히 좋네요! 기대돼요!
잠을 깨기 위해 마시는 정화수로써 커피, 삶을 깨우기 위해 마시는 친구로서 커피. 그게 뭐든 간에 중요한 건 ‘커피’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 함께 자신을 알아가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 그러니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커피 잔을 들고 함께 바람을 느낍시다!
그러고 보니 올해 나무님의 가장 큰 바람은 뭔가요?
2023. 4. 9. 01:34 영월에서 선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