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작가의 스물두 번째 편지
어떤 사람은 여름은 더워서 싫고 겨울은 추워서 싫고 봄은 꼴불견이 많아서 싫고 가을은 쓸쓸해서 싫다고 하더군요. 나무님처럼 추위보단 여름!인 사람들이 아무래도 조금 더 많은 것 같고, 거기에 더해 여름에서 청춘의 예술을 느끼시다니 멋집니다! 나무님의 예술은 여름이라니, 그 문장 자체로 예술이었어요!
전 봄은 긴 겨울이 끝나고 새싹이 돋아나는 그 신비로움 때문에 좋고, 여름은 노숙을 해도 좋은 활기찬 날들이 좋고, 가을은 가열차게 달려온 날들을 마무리하며 떨어지는 낙엽이 낭만적이라 좋고, 겨울은 추위에 이불 속으로 쏘옥 들어가 귤을 까먹으며 긴 밤을 보낼 수 있어 좋습니다. 어느 한 계절을 좋아하면 특정 계절이 삐질까봐 모든 계절을 좋아하는 저는 사실 모든 계절을 싫어하는 이유도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웬만하면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그 계절을 즐겁게 보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좋아하는 이유를 가장 생각해내기 어려운 게 지금처럼 아주 좋은 카페를 우연히 발견했는데, 아기를 데려온 부모가 왔을 때입니다. 부모 눈에는 아기가 너무 예쁘겠지만, 좌식 카페에서 울고 웃고 뛰어다니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는 아기가 저는 예쁘지가 않습니다. 노래를 크게 들어도 그 소리를 뚫고 들어오는 괴성과 박수치며 그 소리를 격려하는 부모를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저출산의 심각함을 생각하면, 무조건 아기를 데리고 있는 사람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봐야할 것 같은데, 보통 남의 애는 예쁘다는데, 참 안 되네요.
저는 거의 불임입니다. 불임 판정을 받은 건 아니지만, 이십대에 자궁내막증과 근종 수술을 네 시간에 걸쳐 크게 했고, 그 후로 계속 추적 초음파를 일 년마다 보는데 여전히 근종이 생겨나고 커지고 있고, 이제는 난소도 안 좋아졌다고 합니다. 거기다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한 지 만 11년이 되었습니다. 임신을 하려면 일 년 정도 약을 끊어야 하는데, 담당의가 임신할 거면, 결혼할 거면 얘기하라고 하더니 이젠 묻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일 년째 공황장애 약도 먹고 있으니 자궁이 좋아도 몸 전체에 도는 약들이 아이에게 안 좋겠죠. 혹 제가 갖지 못해서 아이가 싫은 걸까요? 부러워서? 아니면 예의를 중시하는 제 성격상 요즘 아이들을 키우는 방식에 반감이 있는 걸까요?
어쨌든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바라보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되는 그게 정상이라니, 그 말에 위로받아 원래 마음은 그렇게 말을 안 듣는 걸로!
아무튼 이십대 후반이 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양육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이 평범한 삶인 게 제 또래만 해도 적용되었는데, 불과 십 년 사이에 그게 평범하지 않은 게 되어버렸어요. 제 또래에선 제가 특별한 삶을 살고 있는 거지만, 10년, 20년 아래 세대에 비하면 전혀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삶이에요. 60대의 레즈비언과 20대 게이의 삶이 다른 것처럼 말이죠.
평범하게 사는 게 어려워 나무님은 평범하게 살려고 노력하신다고 하셨죠? 제가 그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면, 나무님이 놀라실 거예요.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바로 평범하게 살다 죽는 거거든요.
나무님 말씀대로 사실 평범하게 사는 건 힘든 것 같아요. ‘보통’, ‘평균’이 되는 건 진짜 어렵죠. 학교에서 상위권이 되기 위해 다들 애쓰고, 하위권이 안 되려고 애쓰고, 누구도 ‘중위권’을 생각하진 않아요. 담임이 ‘반 평균 깎아먹지 마’라고 얘기하지만, 그 평균에 신경 쓰는 학생이 얼마나 될까요? 상위 10%의 사람들이 이끄는 세상. 생활보호대상자를 위한 법, 차상위계층을 위한 대책, 모두 중산층이 무너진다고 하면서 중산층이 되고 싶어하지 않아요.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한 나, 로또가 되어도 상류층이 되지 못하는 나, 하위층에선 벗어나고 싶다, 하류 인생은 이제 그만, 이런 얘기들은 있지만 왜 보통으로 사는 걸 원하지 않을까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은 모두 들여다보면 특별해요. 특별할 수밖에 없는 게, 모두 다 다르니까요.
보통과 구별되게 다른 게 특별한 거고, 보통은 흔히 볼 수 있는 건데, 각각의 인생은 들여다볼수록 흔히 볼 수 없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또 다르게, 흔하지 않게, 특별하게 사는 것도 어려워요. 직장에 다니거나 자영업을 하면서, 가족을 이루거나 비혼을 선택해 살면서 취미로 운동이나 뭔가를 하고 가끔 휴가에 여행 다니면서 원가족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많죠. 업종, 가족의 형태, 취미의 종류, 원가족과의 관계의 정도 등이 다른 것을 ‘특별하다’고 볼 것인지, ‘다르다’고 볼 것인지는 보는 사람의 ‘시각’에 달린 것 같아요.
테레사 수녀, 오바마 대통령, 강수진 발레리나, 소프라노 임선혜, 피아니스트 조성진, 배우 김혜수, 트로트 가수 임영웅, 서태지나 BTS는 특별하다는데 이견이 없을까요?
세월호가 가라앉았을 때 최대 잠수 시간을 잠수했던 잠수부들은 어떤가요? 가자지구에 갇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특별한가요? 오대양 사건 때 집단 자살한 사람들은요? 살해된 다섯 명의 개구리 소년들은요?
특별하다, 대체 그게 뭐길래 저는 특별하고 싶을까요? 평범하기도 힘든데, 특별하고 싶다니요. IQ 112, 언어와 추리 능력은 최상위, 공간지각 능력은 하위. 그래서 종합하면 그저 그런 머리예요. 특별히 물려받은 예술적 재능도 없어요. 남들 안 보는 데서 하고 싶은 걸 위해 엄청 노력하는 편이에요. 보는 데서 하면 실패했다는 걸 들킬까봐 부끄러워서 안 보이는 데서 최선을 다해 보고 깔끔하게 포기하는 편이죠. 이를테면 드럼에서 꼭 쳐야 넘어가는 진도 때문에 공포증이 있는 ‘나비’(윤도현 밴드)를 328번 들었다고 멜론이 알려줬어요. 거의 22시간을 꼬박 쳤다는 얘기예요. 결국 해냈죠. 참고로 보통 평범한 사람들은 서너 번 만에 넘어가는 진도인데, 저는 울면서 연습했어요. 그것도 서른아홉 살에요. 피아노도 체르니 40번 초반까지 쳤어요. 초등학교 내내 다녔었는데, 선생님이 걱정했었죠. 전공할까봐. 음악을 정말 좋아하는데, 노력해도 안 돼요. 초등학교 때 복도를 지나다 우연히 학교 걸스카웃 대표로 합창단에 들어갔는데, 그때 음 하나 틀렸다가 영영 붕어 입이 되었어요. 그래서 수화를 배웠답니다. 노래방 가서 수화로라도 노래하고 싶어서요. 볼링도 배웠는데, 선생님이 어디서 배웠다고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죠. 수영도 끝끝내 마스터반으로는 못 올라갔어요. 진짜 열심히 하는데... 아, 태권도도 여자라 안 가르쳐주셔서 스물넷이 되어 제가 돈을 벌어서 배웠는데, 너무 신나서 버스 정류장에서 연습하고 그랬어요. 성인 여자가 책가방을 메고 열심히 1장을 하고 뒤를 돌았는데, 군용 버스에서 저보다 더 어린 군인들이 창문으로 구경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2단까지 땄지만, 다리찢기가 죽어도 안 되어 3단을 못 땄어요.
소설도 그래요. 저는 읽는 걸 좋아해요. 중독일 정도로 샴푸 뒤에 적힌 글, 과자 봉지 뒤에 있는 글도 다 읽을 정도로 읽을 게 없어서 못 읽었어요. 지금처럼 도서관이 흔하지도, 책이 흔하지도 않았거든요. 전집을 할부로 사주시면 몇 번씩 읽고, 너무 빨리 읽어서 엄마가 진짜 읽은 거 맞아? 무슨 내용이야? 라고 물으시면 내용을 말하곤 했는데, 아마 그 덕에 독후감을 잘 쓰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저는 천재가 아닌 건 분명해요. 다자이 오사무나 박지리처럼 명작을 쓰고 생을 빨리 마감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특별하고 싶었는데 그건 천재들이고, 전 열심히 쓰지만, 아직 등단도 못 했어요. 문창과에서 제일 많이 쓰고, 습작생 모임에서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축에 속하지만, 타고나지 않은 건 분명해요.
그래서 질투해요. 노인과 바다, 레몬, 오베라는 남자,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비행운 같은 책들을, 작가들을... 그리고 열심히를 반성해요. 주변에 글쓰는 사람들은 제가 엄청 열심히 쓴대요. 근데, 328번 한 곡을 연습한 것처럼 몰입해서 소설을 썼냐면, 그렇지 못해요. 항상 ‘제가 좋아하는 일’이라서 가장 뒤로 미뤄요. 누가 부탁한 일, 돈을 버는 일, 공적인 일 등이 먼저고, 제가 좋아하고 아끼는 일은 뒷전이에요. 왠지 그 일을 먼저 하면 ‘이기적’인 것 같아서예요.
그래서 특별하게 되고 싶다, 특별한 삶을 살고 싶다, 특별한 작가가 되고 싶다. 특별한 작품을 써 내고 싶다, 같은 미래의 일들 말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현재. 평범하게 사는 건요. 아니, 제가 평범하면서도 특별하게 사는 건요. 예술적 이기심을 갖는 거예요.
소설이 먼저인 삶.
돈보다 소설, 누군가의 부탁보다 소설이 먼저, 공적인 일보다 내 예술이 먼저. 뮤즈가 찾아왔을 때 외면하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노트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거요. 예술가 마인드라는 게 별 거인가요, 예술이 먼저인 거겠죠. 근데 전 늘 ‘사람’이 먼저예요. 그것도 ‘다른 사람’이요. 그런 환경에서 자랐고, 그런 전공을 선택했고, 그런 종교적 가치관을 가졌어요. 이젠 좀 더 멀리, 넓게 글을 통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래서 글 쓰는 걸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예술적 이기심을 가진 나로 사는 게 오히려 예술가로서는 평범하게 사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인간은 사실 자기 자신이 우선이라, 운전하다 위험하면 핸들을 자기가 안전한 쪽으로 튼다고 하잖아요. 굉장히 이타적인 인간인양, 이타적인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했던 저를 내려놓는 이 순간. 저도 평범한 인간임을, 저도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인정하고 ‘예술적 이기심’이라도 갖겠다고 다짐하는 지금 이 순간이 제가 꽤나 평범한 것 같아 마음에 드네요.
가면을 좀 벗고, ‘그래야만 한다’는 것에서 벗어나 제가 제 자신을 좀 편안하게 해 주는 것 같아서요.
지금도 보세요.
늘 편지 양으로 약속한 두 쪽을 지키려고 하다가 세 쪽을 넘어간 걸 봐주고 있잖아요.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워야 타인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는데, 전 참 위선적인 인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았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변명을 참아봅니다.
나무님은 삶에서 가장 변명하고 싶었던 때가 있나요? 해명이라고 하면 좀 더 적절한 어휘가 될까요? 과거에서 잠시 꺼내서 씻고 싶은 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240704. 서울 어느 한옥 카페에 앉아서 영월의 선물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