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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물작가 윤 Oct 22. 2024

이름에 똥칠 아니하기

나무의 스물세 번째 편지

빠른 답장에 매우 놀랐어요. 어인 일인가요? 혹시 더위를 먹은 건 아닌지 걱정했답니다. 건강 잘 챙기길 바라요. 지난 번 편지에서는 여름의 더위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금세 장마가 찾아왔네요. 대전은 요새 자주 폭우가 내리고 있어요. 동남아 기후가 된 것 마냥 갑작스럽게 비가 퍼붓다가 다시 잠잠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어요. 요 며칠은 새벽에 비가 어찌나 오던지 빗소리에 잠에서 깼어요. 비가 많이 오는데 이불 안에 있는 게 왠지 더 안락한 느낌이 들어서 평소보다 더 뒹굴뒹굴하게 되더라고요. 그 포근한 느낌이란. 세상사 다 잊고 이불 속에 있고 싶은 마음, 선물님도 아시죠? 


게으를 수 있는 자유는 참 달콤합니다. 예전 유행했던 광고문구 따라 더 격렬하게 게으르고 싶었어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떨까. 그저 구름 가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살 수 있다면 어떨까. 예전 어떤 선사가 이렇게 이야기했었지요. ‘일 없는 사람이 귀하다.’ 20대 중후반에 처음 보고 눈에 쏙 들어왔던 문장이에요. 일 안 하고 살고 싶어서 그랬는지 그 말씀의 깊은 뜻을 알아서 그랬는지 그때부터 가슴 한 곳에 머물고 있답니다. 일을 꾸미지 않고도 잘 살고 싶어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지금 여기에 와 있네요. 지금까지의 소회로는 일은 일대로 해야 잘 사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일이 없으면 사람도 귀해지고 돈도 귀해지더라고요. 


20대 중반에 일 없이 돈 버는 노력도 안 하고 산 적이 있어요.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때는 젊음의 치기에 세상에는 돈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게 많다는 신념으로 무장하고 한량처럼 살고 싶었던 거 같아요. 돈은 저절로 벌려야 한다는 ‘특별한’ 믿음을 가지고 마치 내가 ‘특별한’ 존재인 양 살던 시절이었지요. 전 세계적으로 물자가 이렇게 풍요롭게 넘치는데 나에게 왜 돌아오지 않겠는가. 넘치는 것이 나에게 절로 흘러들어오지 않는다면 뭔가 이상한 게 아닌가. 좀 과장해서 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애쓰지 않더라도 먹고사는 것쯤은 아무 문제가 없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살았어요. 다행히 신이 얼마나 저를 사랑하셨는지 굶게 하지는 않으셨어요. 이건 농담이고 실은 신을 가장한 주위에 많은 분들의 보살핌 덕분에 철없던 청년이 그 시절을 잘 헤쳐 나올 수 있었어요. 


돌아보건대 –사실 그때도 내면 깊이에서는 알고 있었는데- 사회생활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서 돈 없이, 돈 버는 노력 없이 살고자 했던 거예요. 돈 벌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곧 사회생활이잖아요. 현대 사회에서 돈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고 연결시키니까요. 사람을 자주 만나고 왕래가 있어야 돈이 내게로 활발히 돌 텐데 사람 만남을 피하다 보니 돈에서도 피하게 된 거예요. 그 사회생활이 힘들어서 돈 버는 것에 가치와 의미를 두지 않는 삶으로 더 경도되었던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 어떤 영성적이고 숭고한 의식도 작용을 한 건 분명하지만요. 


마침 이 편지를 적는 중에 대학 친구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나이 마흔 넘어 결혼한다니 그 친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냥 하지 않으려고요. 마흔도 넘었으니 알아서 하겠지요. 요새는 마흔 넘어 결혼하는 게 대수롭지 않은 세상이 되었잖아요.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에 40대 초반 출산율이 20대 초반보다 높은 유일한 나라래요. 그렇다면 그 친구는 평범한 걸까요, 평범하지 않은 걸까요? 

실은 ‘보통’, ‘평균’, ‘평범’, ‘특별’을 뒤섞어 쓴 선물님의 편지를 보면서 조금 답답했어요. 알 만한 지식인께서 왜 그런 궤변을 늘어놓는 거냐고 한 마디 하고 싶었어요. 단어에 민감한 작가님이 그렇게 혼용해버리면 일반인인 저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하나요. 내가 말했으나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말한 단어의 감옥에 금세 갇히게 될 텐데. 망상이겠지만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그런 님이 되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스치네요. 언어가 아니라 가슴으로 소통하는 우리 사이. (무리...겠지요?) 우리 함께 언어의 감옥에서 탈출해보면 어떨까요. 


다시 친구 얘기로 돌아와서요. 그 친구는 저랑 참 많이 달라요. 아주 세속적이고 성공 지향적이고요. 어디서든 당당하고 처음 보는 사람하고도 쉽게 친해지고 농담도 잘해서 주위에서 인기가 많았어요. 여태 친구가 근심의 그늘에 싸여 힘들어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고민에 빠져 있느니 부지런히 행동하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는 녀석이지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늘 유쾌하고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 같아 대학 때는 부럽기도 했어요. 내게는 없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특별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그에 비하면 나는 ‘남들의 평균보다도 못한 평범함’을 갖고 고군분투하며 사는 것 같았거든요. 


내놓을 게 없이 평범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은밀하게 특별해지는 거였어요. 일 없이, 돈 버는 노력 없이, 그럼에도 유쾌하고 행복하게 인생을 즐기기. 허나 저는 그럴 만한 그릇이 안 되더라고요. 일이 없으니 무기력해지고 돈이 없으니 쪼그라드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차라리 특별한 척만 안 했어도, 평범한 나를 인정하고 그 모습대로만 살았어도 그 시절 정신도 훨씬 건강했을 거예요. 친구처럼 자기 욕구에도 솔직했다면 지금쯤 은행 잔고도 훨씬 풍요로웠을 거예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그때의 나를 만나게 된다면 간곡하게 한 마디 전해주고 싶어요. ‘지금 네가 가진 그대로 아주 평범한 너답게 살 때 가장 특별한 네가 되는 거야. 너만이 네가 될 수 있으니까.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그걸 해, 그저 너 자신이 되는 것.’


저의 해명이 잘 들리는지요? 해명이라고 하지만 사실 변명이지요. 세월을 희롱하듯 한량처럼 살고 싶었으나 세상과 사람을 피하고자 한 거대한 변명이요. 평범하게 사는 게 두려워 도통 특별하지 않는 나를 특별하게 포장하고 싶었던 거고, 자신이 없어서 숨으면서도 구석에서는 완전하게 자신을 드러내려 한 거예요. 내게서 꺼내서 씻어버리고 싶은 게 있다면 이런 자기연민과 위선이랍니다. 어찌나 은밀하고 교묘하게 작용하는지 저도 놀랄 때가 많아요. 


오래 전에 성당에서 몇 박 며칠 동안 도보 성지순례를 간 적이 있어요. 그때 제 뇌리에 강하게 박힌 말이 있어요. 며칠 내내 낮에는 종일 걷고 밤에는 간단한 프로그램을 했는데 어느 날 밤 진행자가 어떤 일화를 얘기해줬어요. 이전 기수 참가자 중 한 명이 건강에 크게 탈이 나서 순례길을 중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대요. 매일 엄청나게 걷고 있으니 발이나 다리에 큰 문제가 생겼거나 몸이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축난 걸 거라고 다들 상식적으로 생각을 했대요. 급히 병원에 가서 진료를 봤는데 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자못 심각하게 이야기하더래요. ‘여기 장에 허옇게 껴 있는 거 보이시죠? 이게 다 똥이에요. 사람은 똥 못 싸면 죽습니다!’ 

아 사람이 똥 못 싸면 죽는다는 말. 이처럼 곱씹을 필요도 없이 평범한 말이 가슴에 들어와 여태 살아있어요. 정말 그렇지요. 밥 먹으면 똥 싸는 게 인간이고, 그 똥 끝내 못 싸면 다시는 못 먹게 되는 게 인간이지요. 밥 먹고 똥 싸는 그 평범한 행위가 우리의 생존을 부여잡고 있는 거예요. 이쯤에서 특별해지려고 ‘변명’하지 말고 똥이나 잘 누는 인간이 되자는 다짐이 다시 서네요. 


변명 : 똥+이름. 이름에 똥칠하기. 


변명과 똥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런 연상이 되네요. 자기의 평범함에서 도망칠 때, 특별해지려고 애쓸 때, 이미 있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려고 할 때, 즉 변명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똥칠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금칠을 하는 줄 알고 하는 짓들이 똥칠이 되고, 똥도 없는 인간인 척 살 때 오히려 더욱 똥칠을 하게 되는 거지요. 조금 더 연상을 이어가면 이렇게 돼요. 내 안에 똥처럼 낡아가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갓 지은 밥처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겠구나. 그렇다면 더더욱 나의 똥을, 내 안에 낡아가고 있는 것들을 잘 숙성시키고 잘 떠나보내고 살아야겠구나. 낡아가는 법을 모르면 새로워지는 법도 알 수 없겠구나.  오늘은 낡고 새로워지는 일을, 똥 싸고 밥 먹는 행위를 더욱 정성스럽게 해 보아야겠어요. 순간순간 낡아가고 순간순간 새로워지는, 이보다 더 영성적일 수 없는 삶을 오늘 살아보렵니다. 언젠가 이 순간을 돌아봤을 때 변명할 거리가 하나도 없도록 말이에요. 


선물님은 어떤가요? 선물님 삶에서 혹은 선물님 내면에서 이미 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여전히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요? 낡음과 새로움은 어떻게 직조되고 있나요? 


2024.07.16.  대전에서 상담사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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