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작가의 스물네 번째 편지
묵은 것을 버린다. 그것은 추억을 버린다는 것과는 다르겠죠. 추억은 미화시켜서 간직할 수 있겠지만, 장이나 김치 같은 발효 음식도 아닌 묵은 마음들을 똥처럼 싸 버릴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
영월은 한참 장마로 비가 무섭게 오더니, 무더위가 한동안 무겁게 짓눌렀어요. 환경을 생각한답시고, 전기세가 무서워서 에어컨을 켜지 않았더니 온몸이 젖은 수건처럼 얼마나 무겁던지요. 그래도 비가 오면 빗소리와 함께 좀 서늘한 바람이 불어 좋았는데. 요즘 영월에 큰 전시가 있어 도슨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열 시에 출근해서 여섯 시까지 관람객들에게 전시 작품들을 안내하죠. 작가와 작품들을 설명하는데, 어떤 관람객에겐 얘기가 길어지고, 어떤 때는 자유롭게 보시게 해요. 그건 듣는 분들의 눈빛이나 태도에 달렸어요. 궁금해서 자꾸 물어보시면 더 자세하게 워크숍이나 작가에게 들었던 내용을 떠올려 말씀드리고, 작품을 더 들여다보면서 저랑 거리를 두시면 저도 뒤로 살짝 빠져요.
전 비가 너무 좋아서 자꾸 다가가는데, 왜 비는 한 발짝 물러서는 걸까요? 더 주룩주룩 왔으면 좋겠는데. 나무님처럼 얇은 여름 홑이불을 감싸고 지루한 잠을 붙들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거 참 좋은데 말이죠. 관계란 게 그래요. 사람은 보통 다가가는 만큼 다가서고, 멀어지는 만큼 물러서는데, ‘삶’과의 관계는 마음 같지 않네요.
특별해지려 할수록 비참해지고, 평범한 자신을 발견하고 평범하게 살려 할수록 평균에서 멀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니 말이에요. 특별, 평균, 평범 같은 단어들을 혼용해서 혼란스럽게 해서 미안해요. 혹시 ‘아폴로’라는 빨대 안에 든 새콤한 불량식품 알아요? 어떤 친구는 그걸 쏘옥 하나도 안 남기고 잘 빨아먹는데, 전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꼭 조금이라도 찌꺼기처럼 빨대 안에 남곤 했어요. 요즘에도 나오더라고요. 초등학생 한 명이 건네길래 먹었는데, 삼십 년이 지났는데도 안 되더라고요. 깨끗하게 쏘옥 먹는 게요. 그때 기분이, 그리고 지금 기분이 그래요. 특별이니, 평균, 평범, 특이, 같은 단어들을 깨끗하게 한 번에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여드름을 깨끗하게 짜내듯, 검은 피지를 쏙 빼내듯, 3점 슛을 깔끔하게 넣듯, 삼 일만에 변비를 확실하게 해결하듯. 153 모나미 볼펜을 끝까지 다 쓰듯, 그렇게 깨끗하게 싹.
구분하고 구별해야 하는 세상에 대한 증오가 요즘 따라 저를 괴롭혀요. 인간답게 살고 싶은데, 여전히 택배를 주문하고, 비닐에 쌓인 채소를 사고, 일회용 젓가락을 씁니다. 텀블러를 쓰고, 웬만하면 걷고, 신발은 종류별로 하나씩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사지 않고, 아주 작더라도 나누려고 하지만, 굶어 죽는 사람이 있는데 화장품을 사고, 깨끗한 물이 없는 지역이 수두룩한데 플라스틱 병에 든 물을 사 마시고, 총에 맞아 죽는 억울한 사람이 있는데, 저는 스페인어를 공부해요.
오늘 도슨트 중 한 명이 오전에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영화를 보고 와서 그 영화 얘길 해줬는데, 그래서 더 힘든가 봐요. 전 나무님 말이 호기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래야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부가 넘쳐나면 흘러서 돌고 돌아야죠. 배고픈 사람이 없어야 하고, 가난한 사람도 없어야 하죠. 평균이나 평범이 ‘기준’이 아니라 ‘당연’한 세상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닌데, 다들 왜 이리 욕심을 내는 걸까요? 물론 저도 욕심내는 인간이라는 게 답답해요. 쏙 빼 먹지 못한 아폴로처럼, 그래서 그 증오가 절 괴롭혀요. 저 자신에 대한. ‘특별하고 싶다’는 열망은 결국 욕심이고, 다른 인간보다 조금은 더 멋진 인간이 되고 싶은 열망, 욕심에서 비롯된 예술가적 욕구인 것 같아 부끄럽네요.
제가 이번에 <영월, 김삿갓_노마드 시인, 김병연>이란 뮤지컬을 썼는데, 엔딩곡 가사에 ‘욕심을 버리고 미련을 버리면 보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 무엇이 중요할까요. 사랑입니다.’ 이런 작사를 썼어요.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겠죠. 자기애, 인류애, 에로스, 가족애... 아마 제가 하지 못하니까 쓰지 않았을까 싶어요. 버리고 싶은데 버리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말하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같이 힘을 내서 해 보자고 독려하려고, 어쩌면 자기애가 부족하고, 인류애를 크게 갖고 싶어하는 것도 욕심부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싶네요.
욕심이란 게 참 어렵습니다.
無
마음을 비우고 똥을 비우고 묵은 제 나쁜 것들을 비우고 싶은데, 無로 아주 잠시는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어디서 그런 慾이 생겨나는 걸까요? 불교에서는 다섯 가지 감각 기관에서 생겨난다고 하죠. 눈(빛), 코(냄새), 귀(소리), 혀(맛), 몸(촉각). 그래서 재물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 색욕.을 오욕(五慾)이라고 하는데, 잠과 허기짐은 인간이 살아있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 해도 나머지는 없어도 되는 걸까요?
하지만 나무님 말씀대로 돈이 있어야 관계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사람으로 기능도 하는 걸요. 이미 세상은 자본주의 사회이고, 사회주의라고 주장하는 나라들조차 독재지 진정한 사회주의라고 할 수 없죠. 돈이 돈을 벌고, 돈이 시간을 사는 시대에 살면서 재물욕이 없는 건 인간일까요? 無心한 상태를 유지하는 인간은 또 얼마나 인간 같지 않습니까. 나약한 인간도, 정신력이 강한 인간도, 다 인간인데, 요즘 ‘인간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런 저에겐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들에 매달려서 갈피를 못잡는 것 같아요. 사십대 중반에 너무 배부른 소리일까요?
앞선 편지에 제가 다른 욕심은 다 버려도 명예욕은 버리지 못하겠다고 고백했던 적이 있는데 기억하실까요? 그리고 저를 ‘인간다운 곧 소설가’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고 얘기한 적이 있던가요? 이 모든 게 계속 계절처럼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아요. 초등학교 4학년 즈음 시작된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을 사십이 넘도록 하고 있다니 스스로가 한심해보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해결 방법으로 ‘대학원에 가서 철학 전공하기’를 자꾸 생각하는 걸 보면 정말 어린 ‘학생’ 같은 사고를 가진 것 같아요.
이미 낡았고, 여전히 새로운 직조는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인간’에 대한 고민인 것 같아요. 현관 발 매트처럼 낡고 더러워졌지만, 새로 바꿔도 어차피 금세 저렇게 될 테니 바꾸지 않고 툭툭 털어서 다시 쓰다 보니 엉켜있는 실들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본질인 재질은 변하지 않는데 발 매트로써 역할은 그럭저럭 해내고, 불편함을 못 느껴 그냥 지나치다가 툭툭 터는 날엔 엄청 신경 쓰이는 거요. 그리고 매일 같이 오가니 눈에 밟히긴 하고, 오가면서 그냥 지나치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이 ‘인간다움’에 대한 갈망을 놓고 싶진 않아요.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의무, 어쩌면 책무는 계속 갖고 있고 싶어요. 하지만 이 문제로 인해 늘 변비에 걸린 사람마냥 일상에서 절뚝거리고 싶진 않은데 말이죠. 스님들이 ‘無’를 추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건 ‘절’이라는 보호막이 있고, 신부, 수녀님들이 ‘진리’만 추구하는 것 역시 먹고 잘 곳이 보장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간인 이상 기본적인 물질이 충족되지 않으면, 또 동지들과 함께 기본 충족에 만족하는 법을 계속 수련하지 않으면 우린 결국 ‘인간’이고 ‘사회’에 살아야하는 걸요.
‘사회’에 사는 나무님과 저는, 심지어 책임질 가족이 있는 나무님과 마음 쓰이는 원가족이 있는 저는, 주변 가까이에 함께 수련하는 동지를 갖지 못한 우리는 어떻게 변명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말하자면 인간 세상에 살면서 니체가 말한 ‘초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역사적 인물인 부처나 예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요? 똥도 잘 싸고, 밥도 잘 먹고, 인류애를 가지고 살고...
왜 이리 답답하죠?
나무님은 답답할 때 어떻게 하세요? 가슴 답답하고, 숨이 안 쉬어질 때, 일이 안 풀릴 때, 명상 하실까요? 산책을 하실까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 또 비법이 있으실까요?
상대가 답답할 때는 어떻게 하세요? 대놓고 말하시나요? 아니면 타인은 바꿀 수 없으니 흘려보내실까요?
이 ‘답답함’을 풀어볼 시원한 이야기, 한여름이 되기 전에 기다릴게요.
2024.7.17. 또 놀랄만큼 빠르게 답장하는 영월에서 선물작가 드림
(아르바이트로 한 자리에 딱 앉아 있으니 답장 쓰기가 빨라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