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스물다섯 번째 편지
저번보다 더 빠른 답장인 거 같은데, 정말 안 아픈 거 맞죠? 편지가 이렇게 반갑다니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신기한 기분이었어요. 군대 시절이 생각나더라고요. 여자든 남자든 누구에게든 편지 한 통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는데. 그 시절에는 핸드폰을 절대 쓸 수 없었고 공중전화도 짬밥이 안 되면 길게 통화하기가 어려웠거든요. 요새 군대는 군대가 아니라는 꼰대 같은 소리가 절로 나오는, 초코파이가 그렇게 맛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 시절의 군대를 다녔었지요. 그 시절 군대에서 편지 받고 설레던 맛이, 살살 편지봉투를 뜯으며 기대에 부푼 약간의 짜릿함을 즐기던 맛이, 최대한 천천히 한 글자씩 화자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읽고 또 읽던 맛이 어찌나 고소하던 지요. 선물님의 이번 편지를 받고는 그 느낌이 살짝 느껴졌다는 거 아니겠어요. 딩동, 도착 소식만으로도 참 맛있는 편지였어요! 단단한 봉투를 뜯는 맛도 없는데 실물도 아닌 이메일로 온 활자를 열어보며 ‘와 반갑다’라고 마음이 말을 하는 게 저 스스로도 좀 웃기고 약간은 서글프기도 했답니다. 왜 나는 여전히 사춘기 같은 감성을 가지고 있나 하면서요.
선물님의 편지를 받고 군 시절이 생각날 만큼 이번 편지가 반가웠던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어요. 전 지금 충주의 어느 산골짜기에 와 있어요. 제가 몇 번 참여했던 명상 프로그램에 봉사자로 자원해서 왔거든요. 여기까지 적다가 흠칫 놀랐는데요. 가만 보니 당장 지금 여기에 외적 조건이 군대와 비슷해서요. 외부에서 한참을 들어와야 하는 높은 산 깊은 골짜기, 군에서 짬밥이 안 돼서 입 닥치고 있던 것처럼 막 시작된 묵언 수행, 프로그램 보조자로서 상명하복하듯 내 의견을 함구하고 진행자의 비위를 최대한 맞추는 마음자세 등. 심지어 여기 저녁식사는 명상에 도움이 되라고 오후 불식을 해요. 바나나 하나와 주스 한 잔이 전부지요. 이마저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을 수 없었던 그 시절 군대와 비슷해요. 전 명상에 와 있는 걸까요? 이십 년 만에 재입대를 한 걸까요? 인간의 두뇌는 참 신기해요. 내가 의식적으로 기억하기도 전에 그 옛날을 소환해서 다시 경험하고 있었네요.
오늘은 명상 프로그램 1일차고요, 왠지 외롭네요. 왠지~(7080 라디오 DJ버전으로 읽어주세요.) 너무 익숙하고 지겨운 외로움이라 웃기고도 서글픈 건데요. 제게 일평생 가장 친한(?) 감정이 이 외로움이에요. 오늘 같은 날 산골짜기 안개를 타고 물씬 수면 위로 올라오면 ‘그 놈 참 끈질기다. 포기할 줄 모르네.’라는 말이 절로 나와요. 한평생 외로움에 스토킹 당하는 느낌이라 ‘거 참 나한테 어쩌라는 거냐?’ 싶다가도 지치지 않는 그 열정에 감탄하며 ‘이제 그만 밀당을 끝내고 제대로 만나볼까?’ 싶기도 해요. 명상 프로그램 첫 날, 봉사를 하며 외로움의 파도를 타고 있답니다. 이게 대체 뭘까요? 이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와서 나는 왜 외롭다고 가슴이 축축하게 늘어지는 걸까요? 심지어 자원해서 봉사하겠다고 와서는 왜 아무도 모르게 외로움과 씨름하고 있는 걸까요? 물론 재입대한 느낌이라면 외로움이 천 번 만 번 이해가 되지만요.
마침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명상 중이니 저도 외로움을 화두로 명상을 해 보고 있어요. 본격적인 명상이라기보다는 일단 화두에 올리는 거예요. 선방의 유명한 화두 ‘이 뭣꼬’를 흉내 내면서 외로움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차려보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아요. 외로움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깊은 외로움은 온몸을 포르르 떨게 하며 제정신으로 생각할 수 없게 하거든요. 외로우니 당장 뭐라도 해서 이 기분에서 벗어나야만 할 것처럼 정신을 위급하게 만들지요. 이 급물살에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기울어지고 넘어지려는 정신을 계속 다시 세우고 있어요. 휘청휘청 흔들리지만 끝내 KO 당하지 않고 링 위에 서서 외로움을 바라봅니다. 슬쩍 겉모습만 보면 이 외로움은 소통이 그립다고 말을 해요. 몸은 산골짜기에 갇히고 마음은 프로그램 의례에 갇혀서 고립된 느낌이라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나 같은 당나귀 귀를 만나고 싶어서 외로움은 대나무 숲을 그리워하며 그리로 갑니다.
틈틈이 짬나는 대로 글을 쓰다 보니 어느덧 프로그램 이틀째 밤이 되었어요. 하룻밤을 자고 나니 외로움은 다소 가셨지만 여전히 내 몸과 정신 어딘가에 해결되지 않은 채 떠돌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이번 편지는 아무래도 저의 외로움 탐구 보고서가 되겠네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토끼굴보다 더 섞갈린 저의 정신세계에서 길을 잃지 말고 끝까지 잘 따라와 보세요.
외로움이 인도한 대나무 숲. 그 숲의 가장 깊은 곳에는 공터가 있어요. 수풀이 우거진 좁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발목까지 물을 적시며 개울을 한참 건너야 해요. 때론 진창에 빠져야 하는데 어느 지점에서는 진흙이 가슴 높이까지 차올라서 도무지 길 같지 않기도 해요. 중간에 거대한 바위 사이 좁은 틈새에 커다란 나무 기둥이 쓰러져 길이 끊긴 듯 보이는 구간도 있고요. 하지만 망설이지 말고 가야 해요. 그 길만이 유일한 길이거든요.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면 난데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공터가 하나 나와요. 마치 오래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장소지요. 햇빛이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처럼 탁 트인 공터를 조명하고 그 빛만큼 맑고 밝은 기운이 감돌아요. 거기에는 노랫소리가 들리는데 거기에 도착한 사람은 데자뷰처럼 누구나 자기만의 노래를 듣게 돼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나만의 기억, 남몰래 혼자 자주 느낀 감정이 내게 너무도 익숙한 멜로디를 타고 울려 퍼지지요. 거기에서는 알게 됩니다. 자기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려요. 알고 싶었던 게 무엇이든 자기에 관한 것은 다 해갈되는 곳. 거짓은 하나도 남지 않고 진실만 남는 곳. 나에게 까마득히 잊혔던 나를 만나는 곳. 이 상상의 길을 잘 따라오셨나요? 이렇게 묘사하면서 외로움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보았어요.
외로움은 저에게 이렇게 말을 해요. ‘태초의 인간이 그리워.’ 태초의 인간. 인류의 시초인 그는 욕심도 미련도 버릴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오욕을 다 채우고도 무심해서 ‘극복해야 할 자기’는 그의 내부에 없어요. 그는 사랑할 필요도 없어요. 그 존재 자체가 사랑이거든요. 그는 태초의 인간이기에 이름도 없어요. 남이 그를 무어라 규정하든 그건 그가 아니거든요. 그를 뭐라 부르든 어떻게 묘사하든 절대 변하지 않는 게 있어요. ‘그’야말로 본질이 인간인 존재. 그는 ‘인간다움’을 선포한 첫 존재예요. 이 태초의 인간이 제 안에 살아있는 어떤 이상상이에요. 그와의 연결이 희미해져서 다시 접속하려 애쓰는 마음은 외로움이고, 그를 순백하게 동경하고 사모하는 심정은 그리움이에요. 외로움은 그리움의 겉껍질인 셈이지요.
제 내면의 풍경을 읊은 게 어떻게 들렸나요? 이 이야기가 답답함을 풀어볼 만큼 시원한 이야기가 되었나요? 사실 어제 오늘 이 명상 프로그램에서도 여러 번 답답한 순간이 찾아왔어요. ‘태초의 인간이 아닌(아닐 수밖에 없는)’ 봉사자들이 제각각으로 의견을 내며 별것도 아닌 거에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왈가왈부하면서 관자놀이에 힘이 들어갈 때가 있었어요. 저는 다행히 대부분의 경우에 당사자가 아니어서 한 걸음 빼고 관전을 했는데 그래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더라고요. 좋은 일하겠다면서, 봉사를 하겠다면서 자기주장대로 되는 게 뭐가 그리도 중요한 것인지. 이럴 땐 이전 편지에 썼던 대로 세월아 내월아 강태공 한량 모드가 참 좋더라고요. 이 장마기간에 비 피해 없길 바라듯이 우리 사이에 묘한 기류에서 내리는 비도 어서 그치길 바라면서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는 거지요. ‘요상한 날씨네.’라고 한 마디 툭 던져놓고 불어난 빗속에서 월척이나 하려 기다려요. 제가 답답할 때는 이렇게 해요. 비가 지나가는 동안 선물님 같은 귀한 분에게 성토를 하며 답답함을 풀어요. 이제야 아셨겠지만 이 편지가 답답함을 푸는 저만의 비결이었답니다. 오늘도 다 들어줘서 고마워요 선물님!
하루 일과를 마쳤으니 이제 꿀잠을 자러 가야겠어요. 군대에서는 자는 시간이 제일 좋았거든요. 이등병 때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곤 했어요. 내일 다시는 눈 뜨지 않길 바라면서, 내일은 내 집 내 방에서 깨어나길 바라면서. 군대 같은 이곳에서 염원해봅니다. 이번 생을 끝으로 다시는 태어나지 않길, 이번 생에 이 존재가 완전히 깨어나길. 저는 오늘 태초의 인간을 마음에 품고 잠에 들려고 해요. 외로움보다는 그리움을, 그리움보다는 가없는 사랑으로 부푼 가슴을 끌어안고 자려고요. 태초의 인간이 내게 다시 생생히 살아나서 나도 사랑 자체인 날이 있어요. 바로 오늘 같은 날. 적다 보니 진심보다 표현이 많이 과장돼서 좀 부끄럽지만 이 사모하는 마음을 선물님께도 보냅니다. 오늘밤은 우중충한 장맛비가 아니라 선물님의 답답함을 식히는 시원한 빗줄기가 내리길.
2024.07.18 충주에서 대전의 상담사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