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작가의 스물여섯 번째 편지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들이 언제든 꺼내볼 수 있게 꽂혀있는데 그 중 하나인 정호승 시인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벽에 걸어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구절을 엽서로 만들어 판 알라딘의 굿즈를 넣어둔 액자가 보입니다. ‘Would you tell me, please, which way I ought to go from here?’ 그리고 정면에는 나무님의 편지가 있지요.
급한 일을 처리하러 컴퓨터를 켠 터라 조금 쓰다가 다시 이어서 써야겠지만, 이 감정을 그대로 적고 싶어서 일단 쓰기 시작했어요.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책 너머 창문으로 장마로 땅이 몽땅 뒤집혀서 흙탕물이 된 동강이 흐릅니다. 그 뒤로 강원도의 깊은 산세가 늘어서 있고요. 여기는 영월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삼옥리’라는 곳이에요. 제가 영월에 살게 된 지 만 이 년차에 영월이 예비문화도시였고, 저는 그때 그 센터의 팀장이었어요. 그때도 장마철이었어요. 영월에 한 달 살기로 방문하신 분들 약 40명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한 분이 물었어요.
“동강이 왜 이렇게 흙탕물이죠? 깨끗한 동강을 기대했는데 실망이에요. 관리 좀 해야하는 거 아닌가요?”
전 깨끗한 동강도 보고, 흙탕물이 된 동강도 본 지라 늘 이렇진 않다고, 비가 와서 그런 것 같은데 평소엔 그렇지 않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늘 그래야하는 거 아니냐고 하셨죠. 그래서 전 호의적으로 말하기 위해 한 번 군에 건의드리겠다고 했죠. 그리고 실제로 건의드리면서 알게 되었어요. 장마로 인해 강바닥이 저렇게 다 뒤집혀 흙탕물이 되고, 흘러 흘러 다 섞여야 다시 물이 깨끗해진다는 걸요. 장마철에 오면 자연스럽게 정화 중인 동강을 볼 수 있는 거죠. 하지만 내가 깨끗한 걸 보고 싶다고 정화 중인 동강을 정화 못 하게 하면 사대강 같은 꼴이 되는 거죠.
전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의 모든 외로움이 너무나 와 닿는데,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특히 몇 개만 손꼽으라면 이 구절들이 미칠 것처럼 외로워서 와닿아요.
그리고 나무님의 그 외로움에 동화되어 뒷 이야기가 궁금해 편지를 막 빨리 읽다가 끝에 가서는 천천히 곱씹으며 천천히 천천히 눈물을 흘리며 읽었어요. Lewis Carroll의 문장 중 전 질문 자체보다 중간에 콤마와 콤마 사이의 ‘please’가 너무나 애절하게 들려요. 그리고 ‘ought to’라는 표현과 연결되어 여기서 어디로 가야만 하는지 묻는 그 마음이 어떨까, 결국엔 그건 방황하고 궁금하고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외로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철학책이라고도 하죠. 오래전에 철학적으로 해석한 책을 선물 받았는데, 아직 읽지 못했어요. 가끔 다 읽어버리기 싫어 아껴두는 책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 거든요.
아. 나무님. 나무님을 따라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만난 ‘태초의 인간’은 ‘인간성’을 논하거나 고민할 필요도 없죠. 맞아요. 하지만 그 태초의 인간은 사랑 자체이나 어쩌면 그 ‘사랑’이면엔 ‘외로움’ 자체이기도 하단 생각을 했어요.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전 신이라면 외로울 거라고 생각해요.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외로울 거라고. 예수나 부처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지금도 크리스마스나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가장 외로운 건 그날 생일을 맞은 당사자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실 거라 생각해요. 전기가 없는 산골짜기. 반짝이는 트리.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고받는 비싼 선물들. 배고파 굶어 죽는 사람들. 깊은 산사에 걸린 연등. 개인의 소원을 빌며 많은 돈을 지불한 초값, 연등값. 그리고 학대받거나 버려진 아이들. 신들도, 초인의 경지에 이른 위대한 인간들도 외로울 때가 있을 텐데, 답답할 때가 있을 텐데, 범인인 우리는 외로운 게 당연한데, 답답한 게 당연하고, ‘태초의 인간’을 다시 살리려 노력할 뿐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게 당연한데, 그 ‘당연’함을 또 놓고 저는 ‘특별해’지려고 애썼던 게 아닌가 싶어요.
사실 어제 엄청난 비를 뚫고 누구를 좀 만나고 왔습니다. 그분이 제게 그러시더라고요. ‘외롭겠네. 근데 외로워서 잘 됐어.’ 보통은 제가 나이를 먹었으니 이제라도 누굴 만나라고 하는데, 예술가니 그냥 자유롭게 살라고 하더라고요. 그 외로움으로 글을 쓰라고. 오히려 혼자여서 잘 한 거라고요. 그런데 그제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결혼한 그림 작가님이 결혼하면 애도 신경 써야 하고, 살림도 신경 써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혼자거나 아니면 봐봐, 유명한 예술가들은 바람피우면서 가정 신경 안 쓰고 자기 예술 생활과 개인 생활했지. 하시더라고요.
근데 사실 저는 ‘외로움’을 좋아합니다. ‘외로움’ 자체를 좋아한다기 보다 외로울 때 살아나는 그 모든 감정을, 어떨 땐 미칠 것 같은 아린 마음을, 머릿속을 헤집는 수많은 생각을, 떠오르는 많은 사람을, 그 모든 휘몰아치는 것들은 ‘외로울 때’ 드러납니다. 외롭지 않고 바쁘면 모두 수면 아래로 가라앉더라고요. 지금 마주 앉은 사람에게 집중하고, 일을 생각하고, 함께 어울리는데 에너지를 쓰느라 ‘창작’을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바쁜 걸 정말 싫어하는데, 먹고 살려니 바쁩니다. 그다지 돈이 되지 않는 일에 매달리고, 외롭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부탁한 일들을 하고, 나무님처럼 봉사활동을 합니다.
심지어 저는 ‘창작’을 주업으로 삼고 싶어하면서도 여전히 예술적으로 ‘이기적이지’ 못합니다. 이러니 외로워서 잘 됐다고 하는데도, 제가 외롭지 않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치며 사는지요. 나무님도 명상 끝에 ‘태초의 인간’을 끌어안고 주무셨다고 하니 어쩌면 재입대한 명상의 끝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전 재입대도 하지 않고, 나무님 덕에 ‘태초의 인간’을 그려볼 수 있었고요. 감사합니다.
제가 눈물이 났던 건 이번 생에 완전히 존재가 깨어나 다음 생은 없길 바라는 나무님의 간절함 ‘please’가 그 깊은 산골에서 영월 삼옥리까지 전해졌기 때문이에요. 단 한 순간의 깨달음. 한 번 깨달으면 다시는 깨닫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죠. 그 깨달음을 유지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니 우리 그 순간을 향해 나아가 보아요. 어쩌면 지난 편지에 썼던 기차역에서 노래를 흥얼거렸던 순간이 제겐 깨달음의 순간이었는지도 몰라요. 그리고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유지가 안 되어 답답한 건지도요.
어쩌면 나무님도 ‘태초의 인간’을 알아본 걸 보면 그런 순간이 이미 있었을 지도 몰라요. 그것이 편지를 쓴 날이었든, 아니면 그 이전이었든.... 외로움보다 그리움, 그리움보다 더 큰 사랑. 이것을 다 품을 수 있는 우리 내면의 ‘인간’. 상처받지 않고, 사회화되지 않고,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인간.
어쩌면 마흔이 되어 ‘삶’을, ‘나’를 고민하는 건 그래도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뜻일지도 몰라요. 금전적 여유도, 중상류층의 삶의 경험도, 뭣도 없으면서 ‘인간답게’ 살고 싶어하는 우리의 간절함이 정말 이번 생에 끝날 수 있기를 같이 빌어봅니다.
어쩌면 우리의 편지가 이어질 수 있던 건 그 간절함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겠다 싶네요. 나무님이 답답함을 이 편지로 푸신다니 제가 이렇게 기쁜 걸 보면, 저도 참 외로운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즐기기도 하는 이상한 인간이고요. 요즘은 정말 외롭고 싶은데 너무 바쁜 날들입니다. 그리고 나무님의 편지를 읽고 덕분에 머릿속으로나마 깊은 산골에 다녀온 덕에 조금 숨을 쉽니다. 후. 아. 후웁.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의 민낯을 서로에게 조금 더 드러내 보기 위해 나무님 인생에서 가장 큰 ‘비극’은 무엇인가요? 아직도 나무님 삶에 그 불행이 영향을 주고 있나요? 아니면 잘 뛰어넘으셨나요?
2024.7.19. 영월에서 서결국 편지를 다 쓴 선물작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