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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Jan 30. 2021

언제 웃을지는 내가 결정해

주도적인 사람이 될 테야

우리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잘 웃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방에 들어와 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거실에서 TV를 보며 하하하 화통한 엄마의 웃음소리를 듣게 되는데, 어찌나 즐거워하시면서 웃으시는지 방 안에 있는 나로서는 무슨 프로그램을 보는 건지도 전혀 알 길이 없지만 그 웃음소리만으로도 덩달아 웃게 된다. 웃는 사람을 보면 따라 웃게 되는 게 인간이라는데 그건 비단 시각적인 자극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청각적인 자극으로도 따라 웃게 되니까. 요즘 울 엄마가 즐겨 보시는 예능 프로그램은 <윤스테이>, <미운 오리 새끼> 등이 있는데, 심지어 가끔은 EBS 간판 요리프로인 <최고의 요리 밥상>에서 진행자인 김동완 님의 멘트에도 빵빵 터지실 때가 있다. 어찌나 즐거워하시는지, 가끔 저 프로그램을 만든 예능 PD에게 세상 재밌다는 듯 웃으시는 울 엄마 영상을 찍어 보내드리면 그 PD에게 진짜 큰 보람을 안겨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오늘도 저녁을 먹다가 거실에 켜놓은 TV에서 웃긴 장면이 나왔는데, 역시나 우리 엄마는 깔깔 웃으시면서 너무나 즐거워하셨다. 아무 생각 없이 밥을 먹던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엄마 방청객 알바 하시면 진짜 잘하시겠다'라고 말했는데, 돌아오는 엄마의 대답이 아주 명언이었다.


"얘, 내가 웃고 싶을 때 웃어야지 남이 시켜서 웃으면 그게 웃는 거니?"


아 그러네. 하긴 생각해보니 나도 대학 다닐 때 딱 한 번 방청객 알바를 해본 적 있었다. 아리랑 TV에서 하는 무슨 퀴즈쇼 프로그램이었는데, 얼마를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꽤 몇 시간 앉아서 제작진이 유도하는 대로 반응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에이, 그래도 방청객 알바하면 돈도 주잖아. 웃기만 해도 돈 주는데 좋지 않아?"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면 그건 웃어도 웃는 게 아니지~"


그렇게 명언을 남기시고는 또다시 브라운관으로 시선을 돌린 채 깔깔대고 웃으시는 울 엄마. 그래 맞다. 제 아무리 좋아 보여도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면 그때부터는 괴로운 일이 된다. 똑같이 괴로운 일도 내 의지로 선택해서 할 때보다 타의에 의해 하게 될 때 더 슬프고 원망이 남는 법이다. 취미가 업이 되면 괴로워진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에는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발견했었다. 아주 오래전 (요새 10대들은 절대 모를) 가수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인 이소은 씨가 어느 대학교 대담? 비슷한 행사에서 한 이야기였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자신은 하기 싫은 걸 하면서 가장 많이 성장하고 배운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오히려 지금은 아, 그때 하기 싫은 일들을 좀 더 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고, 그러니 여러분들도 싫은 일을 할 때 생각보다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라는, 모순적이지만 모순적이지 않은 이야기.


100%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주 오래전, 법인을 하나 만들기 위해 조무래기 같은 친구들과 의기 타협해서 일을 추진했던 적이 있었는데, 너무 좋아서 이 일을 좀 더 잘해보려고 추진한 법인 설립이었건만 막상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맞닥뜨렸던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행정 업무였다. 어떤 기관체를 하나 만들기 위해 백지상태에서 구성원들 간의 의견을 조율해 가장 기본적인 규칙부터 정립해야 했고 뭐 하나 만들 때마다 기록을 남겨야 했다. 결국 끝없이 이어지는 회의와 서류 작업, 그에 수반되는 자질구레한(그 당시 내가 느끼기에는 이 표현이 맞겠지만 사실 어느 것 하나도 자질구레한 것은 없었다) 일들을 처리하다 법인 설립 추진은 백지화되었지만 적어도 그 경험을 통해 나는 많은 걸 배웠다. "아,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구나."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의 구분선은 어디쯤일까


그렇지만 또 무조건 "알겠지? 하기 싫은 걸 먼저 해야 그다음에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거야"라고 라테 멘트를 날리기에는 여전히 내 안에 질문은 남는다. 하기 싫은 것과 하고 싶은 것의 구분선이 과연 명확할까? 나의 경우는 하기 싫은 걸 꾸역꾸역 참으며 포기하지 않고 수년을 버티고 났을 때 '아, 그때 그만두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너무나 다행이었)지만, 내 경험이 인생의 모든 상황에 맞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한 사람의 성공과 실패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와 환경적인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음을 잘 알기에, 누군가 하고 싶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 선상에서 고민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대고 '저는 참고 버텼더니 괜찮더라고요. 그러니 당신도 버텨보세요'라고 말하기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많은 변수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는 아 이거 하기 싫은데 생각이 드는 순간 단칼에 그만두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다 다르고 각자가 처한 환경과 지나온 역사는 천차만별이니까.


어우 역시 노답이군!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나가다가 이건 정말 답이 없는데? 싶을 때 즈음, 엄마가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한 말이 다시 떠오른다.


"얘, 내가 웃고 싶을 때 웃어야지 남이 시켜서 웃으면 그게 웃는 거니?"


그래, 결국에는 '내가' 웃고 싶을 때 웃으면 되는 거다. 누가 결정해주지 않고 내가 판단해서, 그렇지만 그 판단에 따른 책임은 내가 지면 되겠지. 선택의 순간도 '내가' 선택한 그 순간이 최선의 순간일 것이다. 그러니 매 순간의 사이, 그 간극을 채우는 희로애락의 감정들도 최대한 누릴 수 있는 만큼 누려 보자. 남들 보기에 지루하고 따분해도 내가 웃으면 그 프로그램은 내게는 재밌는 프로그램이 된다. 어차피 남들은 내가 무슨 프로그램 보든 별로 신경 안 쓴다. 그러니 내 양껏 채널 돌리고, 내 맘껏 웃고, 내가 채널 돌리고 싶을 때 돌리자. 모두 똑같은 TV를 갖고 있지만 뭘 보느냐에 따라 총천연색의 자연 다큐멘터리일 수도, 흑백의 무성영화일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니까. 그리고 어느 포인트에서 웃을지는 전적으로 그걸 바라보는 내 몫이라는 거 (엔딩 크레디트 올라갈 때까지 안 웃고 무표정으로 있더라도 그 또한 내 선택이라는 거!). 혹시라도 지금 하기 싫은 거 꾸역꾸역 하느라 방금 리모컨 버튼 잘못 누른 걸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웃고 싶을 때 웃으세요! 울고 싶을 때 울고요. 다만 우연으로라도 방금 켠 그 프로그램, 채널 돌리기 전까지는 최대한 집중해서 열심히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아요!"


2021.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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