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을 거슬러
거의 십 년 전? 15년 전? 시카고에서 그 유명한 뮤지컬 Wicked위키드를 본 적이 있다. 주인공 엘파바 역을 맡은 배우가 무려 겨울왕국의 주제가 Let it Go를 부른 Idina Menzel이었는데, 당시는 겨울왕국이 빅 히트하기 한참 전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만큼 유명하지 않았다. 줄거리도 잘 모르는 채 친구가 재밌다기에 무턱대고 보러 갔다가 그녀의 Defying Gravity를 듣고 아니 저 사람은 대체 누구이기에 저 고음을 저리 시원시원하게 부르나 충격을 받고 인터미션 내내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곡은 가사가 특히나 인상적인데, 제목에서 드러나듯 마침내 각성한 엘파바가 이전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온갖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부르는 곡으로, 이 곡이 등장하는 시점은 전체 작품의 전후를 가르는 분수령과도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분수령. 살면서 이제 이전과는 절대 같은 모습으로 살면 안 되겠다 결심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생각해보면 살면서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의외로 내가 가장 아끼고 (그 역시 나를 아낀다 생각했던)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어쩌면 가까운 이들에게 가장 내 속의 이야기와 온갖 고민들을 다 털어놓으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믿고 한 얘기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때, 아 결국 가장 내 깊은 곳의 아픔이나 고민은 내 속에만 묻어두었어야 했던 걸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본인이 상처를 주었는지 잘 모른다. 가치관과 사상은 은연중에 말속에 담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할 수도 없다. 나와 가치관이 다른 것을 비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중심이 굳건하게 잡혀 있었다면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든 별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상처 받은 것은 내 속에 뚜렷하게 자리 잡은 가치관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또 같잖은 소리 하네 하고 가볍게 웃어넘길 수도 있었을 이야기를, 내가 나 자신을 믿지 못하니 수백 번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일 테다. 걱정해주는 척하면서 내 가치를 무너뜨리는 말들을 정말 많이 들어 보았다. 그렇지만 아직 중심이 약한 나는 너무나 쉽게 흔들리고, 흔들리지 않으려면 결국 (당분간은) 그 사람과 거리를 두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한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일은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것과 같이 관성적으로 내가 가까이 두었던 것들에 이별을 고하는 것이라 웬만한 결심과 의지가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거리를 두어야만 할 것이다. 적어도 그 가치관으로부터. 내가 완전히 중심을 잡을 수 있을 때까지는. 쉽지 않은 이 일을 잘 완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