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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Sep 23. 2021

네 잘못이 아니야

태생이 다정다감한 성격이라 괴로운 자 여기 있습니다

나는 다정다감한 성격이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그렇다. 남동생과 둘이 외출이라도 하면 꼭 커플로 오해받는데, 절대 피 섞인 남매 사이에선 나올 수 없는 다정함이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우리 집에 정수기 점검 차 방문했던 중년의 코디 직원분도 '이렇게 다정한 남매는 난생 첨 봐요' 하면서 놀라워하셨으니까. 


남매를 그렇게 키운 우리 부모님은 뭐 두말할 것도 없다. 울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하교하고 집에 오면 항상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은 뭘 배웠는지 꼭 내 눈을 바라보면서 물어봐 주셨다. 내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 진심으로 공감하면서 귀 기울여 들어주셨고 그러면 또 난 그 반응에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성인이 된 지금 난 말을 잘하고 남 앞에서 발표 같은 것을 잘한다는 평을 자주 듣는 편인데 그건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엄마와 대화를 매일 같이 나누면서 터득하게 된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엄마가 내 얘길 허투루 듣지 않았다는 것은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 내가 얘기했던 내용들은 기억하시고 가끔 물어보시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때 네 짝꿍이었던 아무개는 요새 뭐하고 지내니?" "응? 아무개가 누구야 엄마?" "아니 왜 있잖아 너랑 연필 갖고 싸워서 선생님한테 갔었다는 애." "헐 엄마 나 걔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 어떻게 걜 기억해?") 아버지도 그 연세 또래 분들 답지 않게 다정하고 세심한 성격이시다. 엄마처럼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지만, 조용히 그렇지만 누구보다 세심하고 따뜻하게 챙겨주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다.


성인이 되고, 대학에 가고, 직장에 가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런 다정함 게이지가 모든 사람과 모든 가정에서 디폴트 값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 가정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언행들이 다른 집에서는 유난스럽게 보일 정도로 흔치 않은 다정함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집 밖에서는 다정다감할지언정 집에 와서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는 무덤덤하거나 심지어는 냉랭하고 사납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 범위를 좀 더 넓혀 우리 집을 벗어나 한국, 그리고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하와이까지 펼쳐지면 조금 관점이 달라진다. 내 다정한 성격,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고 말을 걸고 따뜻하게 웃는 버릇이 서양인들에게는 '쟤 왜 저래?' 내지는 '나한테 뭔가 바라는 게 있어서 이리 친절한가?'라는 생각을 줄 수도 있는 행동이라는 것을 최근 며칠간 느꼈다. 심지어는 먼저 인사하고 웃어주는 것에 대해 불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행동으로 인해 나를 만만하게 보거나 우습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는 느낌 또한 받았다.


뭔가 바라는 게 있어서도, 상대방에 비해 모자라서도 아니고 단지 그게 인간에 대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태도이고 사람에 대한 도리라 배웠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인데, 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예의범절이 다 이런 디폴트 값을 가진 것은 아니었구나 싶다.


그래서 앞으로는 함부로 웃어주지도, 인사하지도, 말을 걸지도 않을 생각이다.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했다고 자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보았다. 남한테 폐 끼치는 것이 싫어 웃으며 부탁한 것인데 그걸 비굴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시선도 어이가 없다. 기본값이 무관심과 냉정이라면 그냥 나도 대세에 맞춰 사는 것이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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