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학기의 절반이 지난 지금 생존신고
개강하고 미친 듯이 바빠서 한 동안 글을 통 올리지 못했다. 끊임없는 reading과 writing의 향연 속에서, 조금이라도 머리를 놀릴 틈이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뇌 건강에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글 쓰는 게 힐링인 것도 적당히 글을 쓸 때나 가능한 일이다. 너무 과도하게 읽고 쓰는 일에 몰두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일기 쓰는 것조차 사치가 된다.
하와이는 벌써 우기에 접어든 건지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장대 같이 퍼붓는 중이다. 물론 낮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쨍쨍하지만, 저녁만 되면 비가 폭우처럼 쏟아진다. 며칠 전에는 지진도 났었다. 이곳 오아후 섬이 아니라 옆에 있는 빅아일랜드발 지진이었지만. 일요일 오전 11:50분경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오전 미팅을 마치고 잠깐 침대에 누워 있는데 뚜렷하게 느껴지던 진동. 어? 뭐지 싶어 옆을 바라보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브리타 정수기 물병 안의 물이 찰랑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때마침 건물 바로 앞에서 시끄럽게 공사 중이라서, 아무 생각 없었던 나는 '공사 때문에 건물이 이렇게 흔들릴 정도면 이거 안전에 문제 있는 것 같은데?'라고만 생각했지 지진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몇 분 후 친구가 '방금 지진 느꼈어?' 라며 문자를 보내와 그제야 아 그게 지진이었구나 뒤늦게 알았더랬다. 강도 6.2 정도라고 들었던 것 같다. 옆방의 일본인 친구는 일본에서 겪었던 쓰나미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말했지만 에이 그건 비교 대상이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니야? 여하튼 하와이에서 오래간만에 느낀 공포감이었다.
개강하고 첫 한 달은 정말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미친 듯이 바빴다. 이번 학기부터 학부생 대상 강의를 처음 시작하기도 했거니와 수강 중인 수업이 하나 같이 원어민 학생들에게도 힘들기로 유명한 악명 높은 수업들이었기 때문이다. 교수님들 자체는 너무 상냥하고 똑똑하고 수업 퀄리티도 최고인데, 문제는 다 내가 '안 좋아하는' 과목들이고 과제량이 진짜 헉 소리 날 만큼 많다는 것이었다. 정말 분 단위로 스케줄을 짜서 숨고를 틈도 없이 첫 2주를 보내고 나니, 그래도 그거 좀 며칠 고생했다고 다음부터는 요령이 조금 생겨서 어떻게 시간을 관리해야 하는지 조금 감이 왔고, (사실 이게 더 큰 효과를 보긴 했는데) 내려놓을 건 내려놓고 집중해야 할 과목들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 전공과도 무관하고 그냥 졸업 필수 과목이라 들어야 하는 과목들에 들이는 시간을 과감히 줄이고 나니 그제야 숨통도 좀 트이고 스트레스도 덜 받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목들까지 다 열정적으로 들을 수 있으면 배우는 것도 많고 좋겠지만,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고 그러다가 자칫 이번 학기 내에 끝내야 하는 첫 qualifying paper를 못 끝낼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나로 하여금 선택적으로 무책임한(!) 학생이 되게 만든 것.
연구 주제를 찾아가는 과정은 여전히 어렵고 몇 번이나 교수님께 퇴짜 맞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교수님 연구실 문을 두드릴 예정이다. 교수님에게 좋은 피드백을 받지 못하거나 내가 보기에 스스로가 맘에 들지 않을 때면 '아 역시 난 이 길이 아닌가 봐, 잘못된 선택을 한 걸까' 하는 생각을 곧잘 했었다. 내 안의 부정적인 사고 회로가 급 활성화되어 온갖 비관적인 생각들이 부풀어 오르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저 내 기분만 침울해질 뿐), 그렇다고 지금 이걸 다 그만두고 한국으로 갈 것도 아니고 (아무도 뭐라 안 했는데 내 발로 나갈 이유 전무), 한국으로 간다 한들 대단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니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구나, 라는 (어쩌면 처음부터 당연한 귀결이었을) 결론.
최근 전 세계적으로 핫한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나는 내가 그 참가자들 가운데 한 명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남들은 아니 그 멋진 지상낙원 하와이에서 유학이라니 부럽다고 했지만 한창나이에 타국에서 홀로 외로이 사는 것은 사실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여기서 승승장구하면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면 모를까, 현실은 늘 잘 안 터지는 영어에, 미국 애들도 머리 쥐어뜯는 80-100장짜리 논문을 종일 읽고 있노라면 졸업 후에 과연 내 몸 하나 건사할 교수직 자리가 있을까 쏟아지는 의구심을 피할 길이 없다.... 한국에서 학위를 따고 직업을 얻는 것도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유학을 다녀오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때마침 이 학교에서 장학금을 주겠다고 제안해왔고 그게 그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카드였다. 그렇지만 막상 와서 마주한 유학생의 삶은 녹록지 않았고 거기에 코로나 상황까지 더해져 가끔은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현타가 올 때도 적지 않았다(라고 쓰고 현재 진행형으로 읽는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는 까닭은 다른 친구들도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나만 고통스럽게 괴롭게 치열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친구들도 다들 잠을 줄여가며 머리를 쥐어짜며 학업에 정진 중이었다. 때로는 이 길이 맞나 나는 진짜 학자가 될 만한 사람인 건가 스스로를 의심해가며 그리고 날 뽑은 교수들을 의심(?)해가며.... 며칠 전 면담을 하다 이런 취지의 얘기를 꺼내니 교수님이 그랬다. '응? 너 그래서 지금 아예 학교 그만두고 싶어?'
- 네? 아 아뇨? 그건 아닌데요.
- 그 수업만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는 거지? 학교 생활 자체가 괴롭다는 게 아니라?
- 네네 그럼요.
- 아 그럼 됐어. 그럼 괜찮아. 가끔 내 수업에서 보면 '내가 여기 왜 있나' 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애들이 있어. 그런 애들은 학문을 할 수 없어. 그렇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괜찮아. 내가 장담하는데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아질 거야. 벌써 한 학기의 절반이 지났어. 내년의 너는 지금보다 더 똑똑해져 있을 거야.
- 그럴 수 있을까요 교수님.... 제가 학자가 될 수 있을까요
- 당연하지. 몇 년 후에 넌 학위를 따게 될 거야
뭐 교수님이야 그냥 풀 죽은 지도학생 기 살려주려고 지나가듯 하신 말씀이시겠지만 그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 예단해봤자 시간 낭비다. 그럴 시간에 뭐라도 한 자 더 읽고 쓰는 게 미래의 성공 가능성을 높여주겠지. 주말에 하이킹하러 다녀온 다이아몬드 헤드 사진을 보면서 파이팅을 외쳐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