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함께한 타국에서의 질풍노도의 학기를 마무리하며
학기가 끝난 지 벌써 2주가 다 되어 간다. 코로나가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아 다음 학기부터 대면 수업으로 전환한다는 학교 공지가 뜨기 무섭게 오미크론 변이가 기승을 부리면서 또다시 긴장 태세로 들어간 학기 말. 그렇지만 세상사 모든 게 그러하듯 우리는 이 난리 와중에도 기말 주간을 버텼고 어찌어찌 학기도 무사히 끝이 났다. 계획대로라면 기말고사 기간 중에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 지금쯤 한국에서 가족들과 보내고 있었어야 했지만, 갑작스럽게 기승을 부리는 오미크론 변이로 인해 출발일을 일주일 앞두고 항공편을 취소해야만 했다. 3주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겨울 방학 중 10일을 자가 격리하면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학기 중에 몇 번이나 브런치에 글을 남길 만한 사건(!)들이 많았지만 시간도 없고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 종강일이 한참 지난 이제야 자리에 앉아 글로 남겨 보려니, 이번 학기는 학생으로서나 한 인간으로서나 내게 있어 참 중요한 시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학문적으로는 당연히 박사 과정 절반을 넘기는 시기였기에 변곡점과도 같은 시기였고, 인간으로서도 예상치 못하게 너무나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간 군상들을 마주하면서 내가 알고 있는 '인간'의 정의와 '인간성'의 종류도 극히 지구 상 존재하는 인구들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한, 겸손해지는 학기였기 때문이다.
처음 유학을 올 때만 해도 이곳에서 학문적인 것을 배울 거라 예상했지, 인간과 세상사에 대해서 배우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마냥 어린 나이에 유학을 온 것이 아니기에 그래도 어느 정도 사람 보는 눈도 있고 햇병아리들 같은 순진무구한 사람은 더 이상 아니라고 오만했던 것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서 와 살면서 보니 여전히 나는 세상을 모르고 인간을 모르며,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어쩌면 '사람 보는 눈'이라는 것은 애초에 가질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제대로 겪기 전에 일부를 보고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데이터를 쌓고, 그 많은 사람들을 분류할 특정 카테고리나 기준을 갖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프레임이나 criteria만으로 분류하기에는 이 세상엔 정말 엄청나게 다양한 별의별 인간들이 다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기준을 갖기에 충분한 '수'도 대체 얼만큼인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다. 백 명을 만나면 좀 알게 될까? 천 명? 만 명? 비슷한 직업과 국적의 사람 만 명을 만나느니 다양한 국적과 세대를 아우르는 스무 명을 만나는 편이 사람 보는 눈 키우는 데에는 더 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찌어찌해서 사람 보는 눈을 키운다 한들, 내가 몸담고 있는 영역을 벗어나면 기껏 힘들게 세운 프레임은 또다시 무용지물이 된다. 정해진 틀을 벗어나면 한 소리를 듣는 한국에서는 이 프레임이 꽤 잘 통했을지 모르나, 온갖 인종과 사람들이 모여 사는 미국에 와보니 프레임이란 것 자체가 불가능하더라.
일례로 이번 학기에 내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은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이 의외로 정말 드물다는 사실이었다. 입으로는 누구보다 공정과 정의를 외치던 사람이 너무나 당연하게 불법을 저지르고 묵인하는 경우도 보았고, 오픈 마인드임을 강조하면서 (자기 기준에서는) 꽉 막힌 사람들을 힐난하던 사람이 정작 특정 민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것도 목격했다. 뭐든 돌려서 간접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질색한다며 직설적인 것이 좋다고 하던 사람이, 막상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피드백을 접하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개하는 경우도 보았다. 지도교수에게 받은 갑질에 분통을 토하면서 정작 그 자신이 후배에게 갑질(이라 본인은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경우 웬만해서는 얼마 가지 않아 그 괴리가 드러나기 마련인데, 개중 일부는 괴리조차도 아주 주도면밀하게 잘 감추어서, 생각보다 뒤늦게 파악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게 가장 충격적이었는데) 특정 가치의 기준이 영역에 따라 달리 규정된 사람들도 있었다. 가령 친구들과 놀 때에는 배려를 굉장히 잘하는 사람인데, 같은 공간에 사는 기숙사 룸메이트에게는 배려가 전혀 없다거나,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인데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원칙을 어기는 것에 대해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도 있다. 외국인들과 어울릴 때에는 세상 친절하고 유쾌한데 정작 자국인들과 어울릴 때에는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직장 상사가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목격했고 그것을 감싸는 다른 직원들을 보았다면서, 자신은 그래서 한국인이 싫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당신이 만난 한국인들도 전국의 한국인들 중 일부 아닐까요).
이렇게 써 놓고 보니 학기 내내 이상한 사람들만 만난 것 같지만,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번 학기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좋은 일들이 많았다. 누구를 만나든 무슨 일을 겪든, 그 사람과 그 상황에서 배울 점은 배우고 나쁜 점은 닮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면('저렇게는 살지 말자'), 그 어떤 만남과 사건도 내 성장에 있어 다 의미 있고 소중한 것으로 남는다.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서 배우 유태오의 부인인 감독 니키 리 님이 남긴 게시글을 보았다. 처음 감독을 꿈꿀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남편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이 나란히 상영관에 걸렸다고. 그래서 인생은 어떤 일이 언제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그저 열심히 살면 된다고. 그 말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지금 당장은 조금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이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라 해도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겠다 다짐한다. 지금은 대학원생 나부랭이지만, 아니 어쩌면 이후에도 대단한 사람은 되지 못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마주하는 사람들과 상황들을 음미하며 좋은 점을 흡수하고 나쁜 점은 떠나보내며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이게 내가 이번 학기에 깨달은 가장 큰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 잘 가라 2021년! 와 줘서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