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의 일기
음성 언어 말고, 수화에도 억양과 강세가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 있는지? 오늘 학부생 수업에 TA로 들어갔다가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음성 언어와 마찬가지로 수화 역시 나라, 지역, 성별, 연령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한다. 미국인과 한국인이 하는 수화가 다르고, 1970년대에 수화를 배운 사람과 올해 배운 사람이 다르며, 인도에서 처음 배웠다가 일본에서 다시 배운 사람은 양국의 특징이 섞인 수화를 한단다. 사람에 따라 말하는 속도가 다르고 발음이 뭉개지거나 정확한 경우가 있듯이 수화에서도 그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고, 같은 미국이라 해도 동부와 서부끼리도 다르기 때문에 (동부가 좀 더 동작이 빠르고 절도 있다고 함)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수화하는 모습을 보면 대략 어디 출신이고 나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 (심지어 직업군도) 파악이 가능하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교가 어떤지 비교는 불가하지만, 지금껏 한국에서 수화를 다루는 언어학과는 많이 보지 못했다(사실 한 번도 못 봄…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국한된 것이니 팩트체크 필요!). 수년 전 우리 학과에서 컴공과와 공동으로 제스처 이용한 연구를 한다고 했을 때 그 얘길 듣는 사람들마다 ‘언어학 전공인데 수화를 왜 해?’하고 물었었다. 당시엔 나도 몸 동작을 연구하는 것이니 체육학과 같은 곳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의아해 했었던 게 사실이다. 그만큼 수화도 언어의 일종임을 나는 최근까지도 잘 몰랐다.
내가 가장 놀랐던 건 아직 언어학의 언 자도 모르는 학부생들을 위한 개론 수업에서 '수화도 언어에 포함된다’고 (그것도 상당히 비중 있게) 가르치는 그 커리큘럼이었다. 교수님이 관련 자료로 틀어준 영상에서는 수화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하나 같이 당장 교실 밖으로 나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복장과 표정으로 각자의 근무지(이게 가장 중요)에서 수화로 소통을 하는 장면들이 주루룩 나왔다. 대학 교수, 예술가, 대학생, 백발이 성성하고 컬러풀한 옷을 입으신 멋쟁이 할머니, 꽁지머리에 진회색 수트를 차려 입은 할아버지까지.
생각해보면 한국 미디어나 고등교육에서 뉴스를 제외하고는, 수화나 수화를 하는 사람들(내지는 장애인 전반)을 다루는 경우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수화라는 것이 너무나 특수하고 나와는 별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수화가 필요한 그러니까 장애를 갖고도 자신의 직업을 갖고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국인인 내게는 그리 흔한 풍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그 수업이 그렇게 놀라웠고 신선했으며 큰 울림을 주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어를 배우겠다고 온 건데, 막상 박사 과정을 밟으며 느끼는 것은 그냥 내가 사는 이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인종이나 민족적인 특성은 있을지언정 그 안에 담긴 그 사람만의 고유한 성격과 가치관은 국적을 뛰어넘는 듯 하다. 미국인인인데도 나보다 더 개인주의 성향이 덜한 사람도 있고, 일본인인데도 굉장히 솔직하게 속마음을 다 털어놓는 사람도 있고. 내 평생의 경험이라 해봤자 결국 이 나라와 이 시대에 국한된 것인데 그게 진리인 양 나도 모르게 오만하게 재단하고 판단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본다.
(참고로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수업시간에 본 그 영상을 링크로 첨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