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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Jan 15. 2021

생산적으로 멍청한 사람이 되자

유학생의 일기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서 보내기로 한 이번 학기. 한국 시각으로 내일 아침 6시 첫 수업을 필두로 새 학기가 시작된다. 분명 지난 학기 기말고사 기간까지만 해도 '기말 과제하느라 미뤄두었던 페이퍼들 겨울방학 동안 다 읽고 페이퍼 발전 좀 시켜야지!'  몇 번이고 다짐했건만, 막상 짧은 3주간의 방학은 오늘까지만 좀 더 놀까 하다가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노는 건 도대체가 아무리 해도 질리지가 않으니 이거 원.... 침대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리는 것도 얼마나 신나는지! 마음만 먹으면 한 달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인생 망하지 말라고 다행히 겨울 방학은 오늘까지다.


내일 첫 수업에서 다룰 한 장 짜리 페이퍼를 들여다보다가, 첫 문단까지만 읽었는데도 이건 마치 날 보고 쓴 거 같아 한참을 웃었다. 제목을 자세히 보니 이 글은 학술논문이 아니라 에세이 형태로, 미국 버지니아 주립대의 미생물학과의 Martin A. Schwartz 교수님이 쓰신 글이다.


각설하고 Schwartz 교수님은 자신과 같이 미생물학 박사과정을 시작했다가 어느 날 훌쩍 하버드 로스쿨로 가서 현재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동기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수년이 지나 물었을 때 동기는 '매일 같이 멍청한 기분을 느끼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전공을 바꾸었다고 말했단다. 그녀는 교수님이 똑똑하다고 손꼽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교수님 본인의 고백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연구란 그저 내가 이토록 멍청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매일매일 느끼는, 그저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에 익숙해지는 것뿐이라고. 그렇지만 그것은 모든 연구자들에게 있어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단순히 시험문제를 풀고 높은 점수를 얻는 것을 뛰어넘어, 때로는 이 연구 질문 자체가 맞는지도 알 수 없고, 내가 하는 실험과 분석이 적합한지도 장담할 수 없는 지난한 과정을, 모든 박사 과정생들은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한다고.


교수님이 자신의 연구주제를 갖고 학과의 저명한 교수님을 찾아갔을 때 들었던 말은 '나도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 교수님은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신 분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는 (당시 꼬꼬마 대학원생이었던) 자신에게는 곧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과 동일하게 들렸다고 한다. 여기까지 읽는데 지난 일 년간 내가 했던 경험들이 떠올랐다. 나 또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지도교수님께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들고 가봤지만 그때마다 이건 어디가 문제고 저건 어디가 문제고, 이건 그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고 같은 말들을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어떨 때는 교수님조차 잘 모르겠다고 하실 때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재밌게만 보이고 상당히 가능성 있는 주제 같은데 교수님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인다고 할 때처럼 힘이 쭉 빠질 때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나만의 경험이 아니었다니.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최소 두 명은 더 있었다는 사실이 왜 이리도 위안이 되는지.


"살면서 완벽하게 준비가 되는 순간은 절대 오지 않아요."


Productively stupid. 생산적으로 멍청해지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 결국 이 글의 핵심이다. 연구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미지의 세계로 완전히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기에, '멍청한' 느낌이 드는 것은 숙명과도 같단다. 그저 자꾸 반복해서 익숙해지는 것일 뿐이란다. 오히려 멍청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라고. 그래, 생각해보니 예전에 석사 논문을 쓸 때 한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디어가 완전히 정리되고 준비가 된 후에 글을 쓰려고 하는데, 살면서 그런 순간은 오지 않아요. 그러니 그냥 부족한 상태 그대로 쓰세요."


"무지하다는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면 들일수록 미지의 세계에 더 깊이 몸을 담글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더 큰 발견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과학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리저리 좌충우돌 헤매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렇지만 매 순간 무언가 배우는 것이 있기만 하다면 괜찮다는 것을 알게 해 주기 때문이라며 다정한 말투로 이 글은 마무리된다. 생각해보면 꼭 연구뿐만이 아니라 인생 전반이 그런 것 같다.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박사 과정을 시작하기 전의 나는 철저한 완벽주의자였다.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으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고, 내 선택이 후에 어떤 결과를 갖고 올지 두려워 무언가 중요한 결정이나 선택을 할 때면 주구장창 고민을 거듭했다. 박사 과정을 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고,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 머물러도 될지를 결정할 때도 그랬다. 이 정도는 그래도 진로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니 (장시간 고민할 만한) 꽤나 무거운 선택에 속한다. 그렇지만 이 정도에 그친다면 내가 아니지! 마트에서 뭐 하나 살 때도 몇 번이나 고민하고, 뭐 먹을지, 어디 놀러 갈지를 결정할 때도 나는 너무 고민하는 탓에 친구들로부터 원성을 사기 일쑤다 ("어우 야 그냥 일단 질러! 답답해 죽겠네").


그렇지만 인생은 우리 맘대로 되지 않는다. 1안, 2안, 3안까지 짜놓으면 인생은 내 계획에도 없던 4안을 들고 나온다. 놀랍게도 우리 인생에서 우리가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는다. 당장 나부터만 해도 지금 이 학교에서 이 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게 될 거라고는 2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코로나로 인해 온 세상 판도가 이렇게 달라질 거라고 작년 이맘때만 해도 그 누가 예상했나? 심지어 코로나로 한창 난리이던 작년 봄까지도 이렇게 일 년 가까이 오랫동안 코로나로 고생하고 있을 것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몇 달 정도만 좀 조심하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으니까.


도전과 성공을 번갈아 경험했던 20대. 쓰라린 첫 실패를 두 손에 받아 들었을 때에야 나는 인생이 정말 내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내가 바랐던 것과 적당히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것을. 언젠가 어느 기관에서 서울 명문대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대다수의 학생들이 '자신이 노력한 대가로 여기까지 왔고, 자신은 이 결과를 받을 만하다'라고 답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나 또한 20대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30대가 지나 그간 밟아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니, 나의 성공도 실패도 온전히 내 노력과 능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꽃보다 누나에서 윤여정 선생님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던가. 당신도 60살이 처음이라고. 매일 주어지는 새로운 하루가 사실 어제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해도, 오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난생처음인 시간이다. 아주 미세해 보일지라도 분명 다르다. 60세가 되어도 인생은 여전히 새롭고 어렵고, 그 생을 살아가는 나 자신도 지질하다고 하는 게 '자발적으로 멍청해지는' 연구자의 삶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건 왜일까. 무언가를 마스터하는 순간은 쉽게 오지 않는다. 인생과 세상에 통달하는 순간도 오지 않는다. 지질하고 부족해 보이는 나 자신과 맞닥뜨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니 그저 익숙해지자. 여전히 부족한 내 모습을 지켜보며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을 습관처럼 하자는 뜻이 아니다. 그런 순간이 올 때마다 '아 내가 지금 또 뭔가 배우고 있구나.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구나' 생각하자는 뜻이다.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더 나은 어른은 되어보자는 심산으로. 10대, 20대의 내가 '이런 어른이 우리 사회에 있다면 참 좋을 텐데'하고 꿈꾸었던 그런 어른의 모습에 아주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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