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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Sep 26. 2022

마음의 언어

교육 철학에 대해 생각하다

학과에서 내가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나보다 일 년 반 먼저 박사 과정을 시작한 친구이다. 다음 학기를 끝으로 이 친구는 드디어 잡 마켓job market으로 나가야 하는데, 때문에 요새 여기저기 공고가 뜨는 곳마다 지원서를 넣고 있다. 며칠 전에는 우리 분야에서는 아주 유명한 대학교에서 교수를 뽑는다고 해서 그곳에 지원서를 작성 중이라고 했는데, 지원 서류 중 연구자로서의 포부를 담은 연구계획서와 교사로서의 교육 철학을 담은 교육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연구계획서는 쓸 말이 많은데, 교육 철학은 대체 뭘 써야 하는지 모르겠어..." 


우리 학과에서 가장 연구를 활발히 하고 있는 학생답게 그 친구는 연구계획서는 쓸 내용이 가득해 걱정이 없었는데 교육계획서는 도저히 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교육 철학'이라는 말이 너무 무겁고 어렵게 들리는 것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친구의 고민을 들으면서 나는 과연 어떤 교육 철학을 갖고 있을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나도 딱히 마땅한 철학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이곳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겪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떠올리다 보니, 그리고 최근에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을 통해, 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새 나만의 교육 철학을 갖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 학과 박사 과정생들은 학과 외부에서 장학금을 받는 경우가 아닌 이상 학과에서 학비를 면제받는 조건으로 모두 학부생 대상 강의를 맡아야 한다. 나의 경우 지난 학기까지는 학부생 강의 중 가장 쉬운 개론 수업을 맡았었는데, 이번 학기에는 그다음 단계인 수업의 강의를 맡게 되었다. 전체 수강생이 120명이라서 나 외에도 두 명의 동기들과 함께 총 셋이서 같이 공동강의 co-teaching를 하고 있다. 워낙 대규모인 반인 지라 셋이 나누어도 한 사람 당 40명의 학생들을 담당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기말 페이퍼 채점할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거린다.)


아무래도 우리는 교수가 아니라 여전히 박사 과정 '학생'들이기 때문에, 학과에서는 이런 우리들(우리와 같은 박사 과정생 강사가 총 20명 정도 된다)을 감독하고 지도할 교수를 한 명 늘 임명하는데, 팬데믹으로 인해 주립대 예산이 많이 감축되면서 예전에는 정규직 교수들 중에서 임명되었던 이 자리가 최근 몇 년 새에는 외부 강사나 심지어 같은 대학원생이 맡기도 했다. 이번 학기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우리 학과 졸업생 출신이면서 현재 본토에 위치한 주립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 감독직으로 고용되었다. 이 사람이 본토에 있는 관계로 우리는 줌으로 주간 회의를 갖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우리를 감독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 교육철학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일단 이 사람은 '대학원생들은 열심히 일을 하지 않고 게으르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갖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우리는 주 20시간 근무하는 조건으로 강의를 맡고 있는데, 사실 이게 정확히 똑 떨어지기 힘든 것이 어떤 주에는 (특히 개강 초에는) 주 10시간도 안되기도 하고 어떤 주에는 (특히 기말 페이퍼를 제출하는 주간에는) 주 30시간도 넘게 페이퍼 채점을 하게 되기도 한다.


여하튼 이 사람은 우리가 일을 하기 싫어하고 농땡이를 부리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전반에 깔려 있는 모양인지, 회의를 할 때마다 마치 취조하듯 '이번 주에 몇 시간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해줄래?'하고 물을 때가 많았다. 회의 전날에는 내일 회의가 있으니 잊지 말라고 보내는 리마인더 메일에서조차 '내일 몇 시간 무슨 일 했는지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내일 들은 내용을 상부에 보고할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반 협박조의 말을 하기도 했다. 난 처음에 나만 그렇게 느꼈나 했는데 다른 미국인 친구들도 이메일을 보고 나서 '이 무시무시한 메일은 뭐야'라고 말하는 걸 보니 원어민이 보기에도 그런 뉘앙스가 다분한 메일임이 분명했다.


그가 우리를 신뢰하지 않고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본다는 생각이 들자 그가 시키는 모든 일이 하기 싫어졌다. 괜스레 반항심이 생기는 게 꼭 사춘기 청소년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난 어디 가서 책임감이 지나치게 크면 컸지 성실하지 않다는 소리를 살면서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하긴 그도 이번 학기에 우리를 처음 만난 것이니 우리에 대해 뭘 알겠냐 싶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껏 얼마나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학생들을 봐왔길래 저렇게 처음부터 디폴트 값이 '불신'인 걸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이내 내가 처음 학부생 강의를 맡았던 일 년 전이 떠올랐다. 한국에서도 학부생 강의를 많이 해왔던 나이지만 미국에서 영어로 하는 것은 처음인지라 아무래도 첫 학기에는 선배들이나 다른 교수님들이 썼던 강의계획서와 강의 자료들을 거의 그대로 갖다 썼다. 그 수업은 작문 집중writing intensive 수업인 지라 한 학기 동안 총 4,000자에 육박하는 분량의 글을 써야 하는데, 과제 개수와 스타일은 교수 재량이라서 나의 경우에는 500자 짧은 페이퍼 3개, 1,200자 분량 긴 학술 페이퍼 2개를 과제로 내걸었다. 짧은 페이퍼 3편을 먼저 2-3주 간격으로 제출하고 나서 남은 기간 동안은 긴 페이퍼 2개를 중간고사와 기말 과제로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앞서 다른 강사들의 자료를 보니 대부분 최소 글자 수만 제시했길래 ('최소 250자 이상 쓸 것') 나도 그렇게 했는데, 아뿔싸, 나중에 애들이 제출한 글을 보니 250자를 넘기는 것은 물론이고 짧게는 700자, 길게는 심지어 이미 기말 페이퍼 분량의 1,200자를 훌쩍 넘겨서 쓴 애들도 있었다. 개강하자마자 제출하는 첫 과제(길어야 500자를 쓰면 되는 간단한 과제)를 이미 기말 페이퍼 수준으로 공들여 작성한 것이다.


애들이 너무 길게 써서 내니 채점하는 나도 덩달아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무조건 과제 지침을 줄 때 최소 글자 수는 물론이고 최대 글자 수도 주었는데('최소 250자 최대 500자로 쓸 것'), 이 얘기를 다른 친구들에게 하면서 너희도 비슷한 경험이 있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들 '너희 반 애들은 왜 그리 열심히 하지?' 하면서 의아해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 강사들을 감독하는 저 '불신이 디폴트default 값인' 사람을 보고 있자니 이제야 왜 내 학생들이 그렇게 첫 과제부터 열정을 불살라 임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기본적으로 학생들의 능력을 신뢰한다. 내가 학생이었던 시절(물론 지금도 학생이긴 하다만)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이건 너만이 할 수 있는 연구야. 이 연구를 하기에 너만한 사람이 없어'라는 신뢰의 말 한마디였다. 연구라는 것이 정답이 따로 없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기에 정말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가 아닌 이상 연구자들은 늘 자기 의심과 자기 비하에 시달리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제 갓 연구를 시작한 햇병아리 연구자인 내게는 그래서 그런 격려와 신뢰가 담긴 응원의 메시지가 큰 원동력이 될 때가 많다.


학생으로서의 그 마음을 알기에 나는 늘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실수해도 괜찮다, 실수하려고 우리는 여기에 있는 것'이라 주지 시키고 '나는 너희가 잘할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조금만 잘해도 용기 내어 말한 것에 대해 크게 칭찬하고 격려해준다. 우리 모두에게는 누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저 사람이 날 믿어준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 믿음을 저버리기 싫어서라도 인간은 최선을 다하게 된다.



누군가 내게 '당신은 교육 철학이 어떻게 되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학생들을 향한 무한한 신뢰'라 답하겠다. 아기들이 당장 유창하게 말하지 못해도 엄마 아빠가 하는 말은 곧잘 알아듣듯이, 우리에게 당장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능력(performance)은 좀 떨어진다 해도 내면에 있는 잠재력(competence)은 늘 표면적인 능력을 뛰어넘는다. 우리를 감독했던 그 강사는 우리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신뢰가 없으니 우리를 늘 취조하듯 감시했고 실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주 20시간을 채우지 못했다 판단되면 스스럼없이 '너희에게 실망했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친구는 그 말이 너무 충격이었는지 이후 일주일간 그 사람의 성대모사를 하면서 '세상에, 실망했대!'라고 떠들고 다녔다.) 나 또한 부모나 지도교수에게조차 들어본 적 없는 '너희에게 실망했다'는 말을 그 사람에게서 들었을 때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는 미국인이니 당연히 물리적인 영어 능력은 나보다 뛰어나겠지만, 마음의 언어는 알아듣지 못했다. '너희에게 실망했다'는 말을 하는 순간 우리 20명의 표정을 보았다면 그는 그 말을 쉽게 다시 내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영어 원어민이 아닌 지라 수업 중에 가끔 학생들이 하는 질문을 알아듣지 못해 재차 묻기도 하고, 애들이 써서 제출한 페이퍼를 채점하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와서 사전을 검색할 때도 있다. 물리적인 언어는 뒤처지지만, 마음의 언어만큼은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교수의 자리는 지식을 전달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이 스스로의 능력을 믿고 자신감 있게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게 양육하는 자리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제가 할 연구가 아닌 것 같아요' '여긴 제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요' '전 여기에서 공부할 만큼 똑똑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라고 끝없이 의심하고 자문하는 학생들에게 '너만이 이것을 할 수 있다'라고 자신감을 심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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