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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Mar 05. 2024

유학생의 덕목 3: 측은지심의 마음

여기선 우리 모두 이방인이니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유학생활이지만 그래도 나는 이 정도면 꽤 성공적으로 유학생활을 해오고 있는 것 같다. 이전에 유학을 했거나, 현재 하고 있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세상에 이런 일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어려운 일들을 많이 듣기 때문이다. 지도교수와 잘 맞지 않아 힘들어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난이도가 아주 레벨이 낮은 축에 속한다. 같이 공부하는 학과 동료들이 죄다 이기적이고 경쟁의식이 강해서 노트 필기 하나 공유하지 않는 빡빡한 분위기에서 공부하는 사람들도 봤다. 이건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한데 어느 날 갑자기 지도교수가 명을 달리 하거나 다른 학교로 훌쩍 떠나버리는 바람에 도중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경우도 보았다. 그 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지만 다양한 이유로 유학생활은 정말이지 '쉽지 않다.' 언젠가 인간이 느끼는 스트레스의 정도를 조사했더니 타지에서 사는 것,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이 꽤 높은 순위에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여담이지만 결혼하는 것, 배우자가 먼저 죽는 것이 그보다 더 높은 순위에 있었다). 유학은 바로 그 두 가지를 결합한 데다가 추가로 학업적 어려움까지 겹치니 그 난이도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타지에서 잠깐이라도 (여행이 아니라) '거주'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이해하겠지만 타지살이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한때 유행했던 '한 달 살기'는 논외로 한다. 한 달 후에 돌아갈 것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과, 언제 돌아갈지 기약이 없는 것 내지는 최소 1년 이상은 살아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거주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하이오 출신인 친구가 하와이에 왔더니 향수병을 느낀다며 푸념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말이 통하는 그들조차 이렇듯 생소한 문화권에서의 생활은 버거운 일인데, 하물며 나 같은 외국인에게는 어떠하겠는가. 방학에 한국에 들어가 사람들을 만나면 열에 아홉은 미국 생활 좋겠다고, 부럽다며 자기도 해외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막상 타지에서 살아 보면 어디서 살든 고생은 기본 옵션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시간문제다. 한국에서는 너무 익숙하고 당연해서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일들이 미국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장 은행 계좌를 열고 신용카드를 만드는 것, 세탁기나 가스레인지 등 잡다한 가전이 고장 나서 교환하거나 수리를 받는 일, 전기나 와이파이를 설치하는 일 등이 그렇다. 한국에서는 인터넷이나 전화 한 통이면 빠르면 당일, 늦어도 1-2주 안에는 바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하와이에서는 전화 연결을 해도 수리 직원이 집으로 오기까지도 시간이 걸리고 (수리공이나 수리에 필요한 부품이 하와이에 없어서 본토에서 공수애 오는 경우 심하게는 몇 달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차를 사고 관리하고 나중에 떠날 때 다시 되파는 것, 전기세, 집세 등, 말 그대로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타국에서 (그것도 외국어로) 해내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러니 헬조선이네 뭐네 늘 우리끼리 지지고 볶고 해도,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에서의 생활이 미국에서의 생활보다 '정신적으로는' 낫다고 본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을 느끼는 일은 없으니까. 미국에서의 생활은 한국에서 겪는 대부분의 어려움에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얹어진다고 보면 된다.


이방인으로서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 주는 것은 역시 음식, 그중에서도 분식이지!


나는 입학 이래 쭉 학교 기숙사에서 살고 있는데, 이번 학기에 새로 내 옆방에 이사 온 학생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간 내가 얼마나 좋은 이웃을 만났는지 알지 못했다. 이전에 같은 층에서 이웃으로 지낸 학생들과 지금껏 무탈히 잘 지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온 이 친구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같이 사는 사람(물론 각자 방은 다르지만)이 나와 맞지 않을 경우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우선 이 학생은 아침형 인간이다. 새벽 5시에(가끔 그전에도 일어나는 것 같다) 기상한다. 그리고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거나 자기 방 문을 닫을 때는 '쾅' 소리가 온 층에 울릴 만큼 세게 닫는다. 미국은 모든 문이 호텔 방문처럼 되어 있어서, 그냥 손을 놓으면 자동으로 스르륵 닫혀서 잠기게끔 되어 있다. 우리 기숙사 건물의 문은 특히나 열고 나서 그대로 손잡이를 놓으면 닫히는 소리가 좀 크게 울린다. 가끔 이 소리 때문에 다른 기숙사생들끼리도 갈등이 생기는 경우를 보기도 했고("방 문 좀 조용히 닫아라", "내가 내 방 문 닫는 것까지 신경 써야 하냐" 등), 나 또한 문 소리가 크게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문을 열고 나서 완전히 닫힐 때까지 문고리를 잡고 일부러 조심해서 닫는 편이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짐작 가능하겠지만 그 학생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인 것 같다. 문을 항상 쾅쾅 닫는데 나는 처음에는 이 친구가 오늘 무슨 심하게 화가 나는 일이 있었나 했다. 우리 층에 다른 학생들도 내가 하는 정도로까지 조심스러워하지만 않지만 여하튼 이전에는 문 소리가 크게 거슬린 적이 없었는데, 이 친구가 새로 온 다음부터는 쾅쾅 닫히는 문 소리에 깜짝 놀라거나 신경이 거슬리는 경우가 잦아졌다. 아마도 그건 이 친구가 아침형 인간이라 혼자서 새벽 5시부터 요란스럽게 돌아다니다 보니 더 두드러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보통 7시에 알람을 설정해 두는데, 이 친구가 온 다음부터는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에 이 친구가 여 닫는 문 소리에 강제로 기상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아침형 인간이면 밤에는 좀 일찍 자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거의 새벽 1시에서 2시에 잠드니까 어떨 땐 잠들었다가 한 밤 중에 이 친구가 내는 문 소리에 깨기도 한다. 


내 방 바로 옆방에 살기 때문에 내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여파를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여하튼 처음에는 스트레스만 받으며 귀마개를 사서 귀에 꽂고 잠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학생이 또 새벽 5시부터 문을 으스러지듯 쾅 닫는 소리에 잠에서 깼는데, 때마침 그날은 나 또한 전날 밤늦게까지 페이퍼를 쓰느라 새벽에 간신히 잠이 든 상태였던 터라 두어 시간 힘들게 자다가 깼더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나도 좀 참았으면 좋았을 텐데, 순간 짜증게이지가 극도로 상승한 나는 일단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가서 세수를 했다. 그러다가 세면대를 지나 화장실 안쪽에서 나오던 이 친구와 마주쳤다. 앞으로도 쭉 같은 층에서 살 텐데 혼자서 끙끙 앓느니 아무래도 말을 하고 협조를 구해야겠다 결심한 내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어떻게 말해야 하나 며칠간 고민했는데 나 뭐 하나 부탁 좀 해도 돼?"

"부탁? 뭔데?"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는지 이 친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실 우리 층 사람들 중에서 아침형 인간은 너와 나 둘 정도인 것 같아. 나도 아침형 인간이긴 하지만 보통 빨라야 6시, 보통은 7시쯤에 일어나거든? 다른 애들은 8시 반에서 9시에 일어나는 것 같고... 미안하지만 새벽에 일어날 때에는 주위가 다 조용하다 보니 문 소리가 워낙 크게 울려서, 내가 자다가 그 소리에 잠에서 깰 때가 있어. 앞으로는 문을 닫을 때 조금 신경 써서 닫아줄 수 있을까? 나의 경우는 보통 문 손잡이를 끝까지 잡고 있어. 그러면 소리가 좀 작게 나거든."


상대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유쾌한 이야기일 리 없을 터였다. 표정이 좋지 않은 게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한 것을 거슬려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에 말을 덧붙였다.


"이게 낮에는 사실 별로 크게 들리지 않는데 (사실은 낮에도 크게 들리지만...) 새벽에는 워낙 사방이 조용하다 보니 더 크게 울리는 것 같아. 근데 내 말을 기분 나쁘게 듣거나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가 계속 앞으로도 같은 공간에서 살아야 하니까 서로 조금씩 불편한 게 있으면 이야기하면서 맞춰가면 좋을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거야. 너도 내가 특별히 조심해줬으면 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얘기해."


나만 일방적으로 '이렇게 해달라' 요구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예의상 덧붙인 말이었는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 친구가 '너 어젯밤에 방에서 줌 미팅한 거야?'라고 물었다. 주말 저녁에 늘 하는 줌 미팅이 있는데 아마 그걸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맞다고, 그건 왜 묻냐고 했더니 '미팅할 때 목소리 좀 작게 해 줄래?'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순간 생각했다. 아, 나 문소리 조심해 달라고 말 괜히 했구나..... 얘 내 말에 기분 상했구나....


내 방에서 소리 지르며 통화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회의할 때 개미소리 같이 작게 말하는 것도 어려운데, 게다가 내 목소리가 아무리 커봤자 온 층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자기 방 문 소리보다 더할까 싶었지만, 여기서 '야 내 목소리가 크면 얼마나 크다고!'라고 말할 순 없었다. 그러면 이건 완전 전쟁모드 돌입일 테니까. 일단 알겠다고 조심하겠다고 하고 훈훈하게 대화를 마쳤다. 내가 문 소리에 거슬려한다는 걸 그 친구가 짐작조차 못했듯이, 어쩌면 내 목소리도 그 친구에게는 거슬릴 수 있을 테니까. 사람은 다 다르고 각자 예민한 부분도 다르기 마련이니,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내 요구사항에 대해 그 친구가 조심하겠다고 한 이상 나도 그 친구가 요구한 부분에 대해 노력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행히 찝찝했던 대화와는 달리 이후 하루? 이틀 정도는 정말 이 친구가 조심해서 문을 닫는 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는 내가 문 소리에 놀라거나 거슬리는 일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틀 정도 지나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이전과 똑같이 문을 쾅쾅 닫기 시작했다. 새벽에도 천둥이 치듯 쾅 닫는 문 소리에 다시 잠에서 깨는 날이 많아졌다. 말을 아예 안 했으면 모를까 분명히 내가 네 그 문 소리에 잠에서 깨는 일이 있으니 조심해 달라고 말했는데도, 알면서도 개의치 않고 여전히 쾅 닫는 것처럼 느껴지자 내 말이 우습게 들렸나? 나를 무시하나? 싶어서 기분이 더 상했다. 나도 그날의 대화 이후 방에서 전화통화하거나 줌 미팅할 때 목소리를 작게 하려고 조심하고 있던 차에 상대가 내 요구사항에 개의치 않아 한다고 생각하니 더 괘씸했다.


오늘도 쾅쾅 울리는 문 소리에 신경이 잔뜩 거슬린 채 새벽에 눈을 떴다가, 도저히 화가 나는 걸 참을 수 없어 눈곱만 떼고 산책을 나섰다. 화가 나거나 감정적으로 힘들 때면 나는 그냥 무작정 밖으로 나가서 화가 좀 수그러들 때까지 걷곤 한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걷다 보니 생각이 좀 정리가 되는 게 느껴졌다.


'그래, 우리 모두 여기서 힘들게 고군분투하면서 유학 생활하고 있는데, 뭘 우리끼리 또 미워하고 그러냐. 걔도 나름대로 힘든 구석이 있을 텐데.... 우리끼리 미워하기 시작하면 너무 힘드니까, 타지에서 고생하는 사람들끼리라도 그냥 이해해 주자..."


그냥 그 사람은 문 소리가 신경 쓰이지 않고, 남이 이걸로 스트레스 받든 말든 신경 안 쓰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도 혼자서 너무 애쓰지 말고 내 목소리 주의할 필요 없겠다. 세상사 모든 것은 장단이 있다고 했다. 차라리 잘된 걸 수도! 나도 사실 내 방에서 떠드는 것 갖고 목소리 크다며 뭐라고 하니 가족과 전화통화 한 번 할 때도 바닥에 주저앉아 눈치 보면서 이야기해야 해서 스트레스받았는데, 피차 옆방 친구도 문 소리 쾅쾅 내는 걸 보니 나도 그냥 이전과 같이 평소 내 볼륨대로 말하면 되니 잘 된 일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랬다고, 이 모든 게 다 거슬리면 힘든 사람이 기숙사 나가 살면 될 일. 졸업 때까지 기숙사 나갈 계획 없는 나로서는 그냥 수그리고 어느 정도 감내하면서 사는 게 최선이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좀 더 너그럽게 관용과 측은지심의 마음을 갖는 것이 평탄한 유학생활의 필수 요소 중 하나임을 또 한 번 깨닫는 이번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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