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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Mar 12. 2024

유학생의 덕목 4: 신경 끄기의 기술

불안을 잘 견디는 자가 승리한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배우는 것은 비단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건 기본 옵션이고, 나는 여기 와서야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것 같다.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고 또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내 생각에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불안을 잘 견디는 것'인 듯하다.


유학 생활 중 불안함을 느낄 만한 상황은 수도 없이 많다. 해외에서 유학 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우선 '내가 해외에서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잘 살 수 있을까'에 관한 걱정이 가장 첫 번째 맞닥뜨리는 불안과의 조우일 것이다. 나의 경우는 이전에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 미국에서 지내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비자 발금 과정이나 장학금 등에 관한 행정적인 것에 대해 전혀 무지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박사 과정은 길어야 1년인 교환학생과 달리 최소 4년에 해당하는 장기간 체류이기 때문에 정말 걱정을 많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늦은 나이에 유학을 오는 사람이라면 졸업 후의 진로나 결혼 등, 인생 과업에 대한 불확실함도 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일 터다.


나의 경우에는 연구와 관련해서 불안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어떤 연구를 맨 처음 시작할 때, 그러니까 어떤 현상에 대해 순수한 궁금증에서 시작해, 그 주제와 관련된 선행 연구들을 살펴보면서 범위를 점점 좁혀 나가면서 연구 주제를 확정하게 되기까지의 과정 가운데 불안을 느낄 때가 많다. 교수님들이야 경험이 많고 듣고 보신 것이 많으니 딱 보면 척 이시지만, 아직 학생인 우리 입장에서는 지금 내가 흥미를 느낀 이 주제가 별 실속 없는 주제인지, 아니면 계속 끌고 나갈 만한 비전이 있는 연구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 좋게 해 볼 만한 주제라 판단이 되어서 시작을 하다고 해도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후에도 어디서 발표를 하든 수많은 교수님들과 리뷰어들의 평을 듣다 보면 '역시 아니었나... 이쯤에서 접어야 하나'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지난 2년 동안 진행했던 연구만 해도 작년 말에 꽤 큰 학회에서 구두 발표에 초대되는 기회를 얻었고 학회에서 실제로 상당히 좋은 평을 들었음에도, 비슷한 시기에 초록을 제출했던 또 다른 학회에서는 '이 초록만 보아서는 학계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전무한 연구'라는 평을 들었다. 심사평이라는 것이 연구를 좀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연구자에게 건설적인 조언을 주는 것을 목적인 것을 생각하면, 내가 들은 저 악평은 연구 발전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기분만 상하게 하는, 정말이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평인 셈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여하튼 요지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관한 불안을 연구자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 정도로 극단적인 악평은 너무 극단적이라 차라리 쉽게 제낄 수라도 있지, 대부분의 심사평은 정답/오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어디까지 내가 받아들이고 어디까지 쳐내야 할지, 어디까지는 그냥 넘겨도 될지를 판단하는 것이 늘 난제다. 만약 이번 학기가 내 박사 과정 첫 학기였다면 저 심사평을 듣고 유학을 접어야겠다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덧 몇 년을 두들겨 맞다 보니 맷집이 세졌는지 며칠이 지나자 곧 잊어버렸고 나는 여전히 그 연구를 하고 있다.


그 리뷰어 한 명이 학계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다 진행한 연구를 이제 와서 저 사람 말 한마디에 내가 접을 것도 아니라면,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받아들이고 내 갈 길을 가면 될 뿐이다. 그리고 사실 찬반양론이 다 있어야 학문은 발전하는 법이니 모두가 내 연구를 마냥 좋아해서도 안될 일이다. 그러니 '이 연구는 어쩌면 별 볼 일 없는 연구인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최악'이라는 평을 듣게 되더라도 끝까지 나 자신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대범함이, 연구자에게는 필요하다.


두 번째 불안함은 학과 내 다른 학생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건 아직 어떠한 연구 결과물도 나오지 않아 스스로에 대해 아직 학자로서 자신감이 부족한 박사 과정 초반에 많이 발생하는 것 같다. 좋은 학교일수록 우수한 학생들이 많고 그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오는 현타가 '혹시 내가 진로를 잘못 택한 것은 아닐까' 내지는 '내가 지금 맞게 하고 있는 것 맞나?', '내가 지금 더 노력해야 하는 건 아닐까'와 같은 의구심을 끊임없이 갖게 한다. 초반 2년 정도는 이런 생각 때문에 상당히 괴로워하면서 시간을 보냈었는데, 돌이켜 지금 생각해 보면 필요 이상으로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느라 나 자신을 많이 갉아먹었던 것 같아서 당시의 내가 안쓰럽게 느껴진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렇게까지 나 자신을 몰아세우지 않고 좀 더 스스로에게

너그럽게 대해주고 격려해주고 싶다.


내 지도교수님이 언젠가 해주었던 말이 큰 위로가 되었었는데, '못하는 사람들 틈에 끼면 그냥 다 못하다 끝나는 것이고, 잘하는 사람들 틈에 껴서 배워야 다 같이 성장하는 것'이라며, '파도가 높을수록 배가 높이 뜬다'는 미국 속담을 들어 설명해 주신 적이 있다. 너는 지금 우수한 학교에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고, 그러니 다들 고생해서 탑 스쿨에 가려는 것 아니겠냐며, 앞으로 너보다 잘난 사람들을 보거든 '아 내가 또 성장할 좋은 기회가 왔구나' 생각하라고 하셨었다. 그 이후로 잘하는 사람들을 볼 때 불안감을 전혀 안 느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말씀을 상기하며 나에게 발전이 되는 방향으로 생각하려 노력했고 나름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것 같다. 결국 내 비교 대상은 언제나 지난 과거의 나 자신 뿐이고 그 누구도 아니라는 것, 또한 내 주위의 누군가 일이 잘 풀리면 잘되는 사람과 함께 연구하니 좋은 것이라 생각해야지 그를 내 경쟁 대상으로 생각하며 나 자신을 비하하거나 그 사람을 질투하기 시작하면 불행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미 다 지나가 버려 어쩔 수 없는 과거를 돌아보며 영원히 후회하지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내다보며 (틀릴 수도 있는) 예상을 하느라 앞서 불안해하거나 고통받지도 않는 것이 성공적인 대학원 생활(어쩌면 인생 전반)의 열쇠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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