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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ady Sep 30. 2024

그 남자의 목숨 값

산업재해, 중대재해 합의

" 천만원 ?! "


 나도 모르게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


 사업장 측에서 제출한 합의서에는 말도 안되는 금액이 적혀있었지만 유족의 도장과 신분증이 붙어있었다. 이제껏 많은 합의서를 받아왔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이번 합의서 만큼은 종이를 파쇄하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


 망자는 태어난지 6개월 된 아이와 아내를  30대 초반의 젊은 가장이었다.


 이 남자의 목숨값은 이제 천만원이 되었다.



 

 일을 하다 사람이 죽으면 여러 사람들이 출동한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구급대원' , 변사이유와 업무상 과실을 조사하는 '경찰', 사고의 원인과 사업주의 안전조치 위반에 대해 조사하는 '노동부 근로감독관과 산업안전보건공단 직원'.


  여러 기관이 한꺼번에 들이 닥치는 만큼 사고이후에는 북새통을 이뤄 모두가 제정신이기 어렵다. 사업장에서도 상황파악, 기관대응, 사고수습을 진행하느라 여력이 없고, 사고조사를 하는 우리 근로감독관들도 사건이 오염되지 않도록 목격자들 조사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이 중에서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황스럽고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 있으니, 사고로 가족을 떠나보낸 유족이다.


 사고로 인한 죽음은 한밤에 들리는 큰 북소리와 같다. 경황이 없고, 제정신이기 힘들고, 앞이 캄캄하고, 당황스럽다. 준비없이 찾아온 이별이기에 상실감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된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은 그런 상황을 아랑곳 하지 않는 듯 잠깐의 휴식조차 주질 않는다. 고통을 미처 감내하기도 전에 이런저런 일들이 찾아와 괴롭혀 온다.


 ' 장례준비는? ' ,  ' 보험처리는? ' ,  ' 재산 정리는? '

 평소에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낯선 것들이 한꺼번에 찾아오다 보니 제대로 대응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제대로된 의사결정을 하기가 힘들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 처한 분이 있다면 하던 일 멈추고, 두 손 꼭 잡고, 단 한 가지만 얘기하고 싶다.



 제발, 제발, 아무데나 싸인하거나 도장찍지 마세요.




 기본적으로 사람이 일하다 죽는 경우 일차적인 책임은 회사에 있다.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처벌법에서는 사람이 일하다 다치거나 죽지않도록 사업주의 안전조치 의무를 규정하고 있고, 근로기준법에서도 일을 하다가 근로자가 다칠경우에는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재해보상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사업주 측에서는 사고에 대한 형사적, 민사적 책임을 최소화 하기 위해 애를 쓸 수 밖에는 없다.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유족과의 합의서이다. 형벌의 감경수단이 되고, 민사상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당장 장례를 치룰 돈도 없는 상황에서 '장례비는 우리 회사에서 부담할 테니까..' 하며 선심쓰듯 합의서를 들고오는 사업주 측에 유족은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이유로, 사업주가 영세하다는 이유로, 잘 모른다는 이유로, 기존에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함부로 도장을 찍거나 싸인을 한다.  내가 산업안전 업무를 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한번 도장을 찍는 순간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번은 선배가 그랬다. 우리는 무당처럼 망자의 한을 달래는 사람들 같다고. 내 생각도 비슷하다. 일을 하다 돌아가신 분이 억울하지 않도록, 여한이 남지 않도록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죗값을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수사하고 송치한다. 그러나 형사적인 부분 외에 민사와 관련된 부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정신없는 상황에서 쉽게 의사결정해서는 안된다. 일이 다 정리된 후에, 잘 알아본 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사업주와 장기간 합의를 거친 이후에 생각해도 늦지않다.


 합의서를 읽으며 망자의 동료들이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이가 태어난지 얼마안됐다." "젊고 착한 사람이었다. 술도 안하고, 담배도 안피우고 가족들만을 위해 열심히 사는 친구였다." "평소 인간관계도 좋았고, 건강했다"


 망자는 참 성실하고 착실한 젊은이였다.


 돌아가신 분의 유족도 생각해봤다. 6개월된 딸을 육아하기도 바쁜 상황에서 남편을 잃고 느껴졌을 절망감내가 감히 헤아리기는 어려운 고통이었을 듯 하다.


 그날 내가 받은 합의서에 적힌 젊은 가장의 목숨 천만원을 다시 바라봤다.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문서를 접수하고 사건기록에 편철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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