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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는 세계다." 사르트르의 <구토>

부조리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feat. 까뮈의 이방인)

by 기록하는 인간



2010년 1월 2일, 한 권의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2025년 3월, 꼬박 16년 만에 끝까지 읽어냈다. 사르트르의 <구토>는 그만큼 나에게 어려운 책이다. 사실 구토를 이야기하기 전에 까뮈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의 관점부터 비교해야 조금 더 쉽게 구토를 이해할 수 있다.'부조리의 철학', '실존주의'에 대한 나의 관심은 꽤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23살, 나의 첫 '실존주의' 입문책은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까뮈의 <이방인>이었다. 뫼르소의 개연성 없는 행동, 이유를 불문하고 부조리함을 관통했던 <이방인>은 내 마음에 강력한 파동을 일으켰다.

나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차별, 가정불화로 가득했다. 나는 이 세상에 대해 속 시원하게 규명해 줄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다. 그것이 내가 살아갈 이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까뮈는 그 '살아갈 이유'를 세상 밖으로 던져버렸다. 세상에는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저 우연하게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며, 나의 환경과 상황 또한 이유 없는 우연한 과정에 불과했다. 상황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그의 말은, 나 혼자 설명해 내기 어려웠던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체증을 한꺼번에 씻겨내주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나의 감정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세상을 '부조리'의 프레임으로 가둬두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원래 그런 거야. 나는 이런 부조리한 세상에 던져진 거고.'라는 합리화로 세상을 바라봤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까뮈는 굉장히 염세적인 인간이었다. 그에게 있어 '부조리철학'은 삶의 무작위성을 잘 뒷받침해 주는 추진력 강한 이론이었다. 그는 인간이 시지프스처럼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쉴 새 없이 지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상황에 놓여있고 '견뎌내는 것'이 곧 극복이자 반항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까뮈의 해결책은 실천적이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극복'이라기보다는 '반항'에 가깝다. 까뮈는 부조리를 설명하는 데는 명확하지만, 해결 방법은 절대적인 해답이라기보다는 개인의 태도에 맡긴다.

이에 반해, 사르트르는 부조리 속에서도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주어진 조건을 넘어서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사르트르와 까뮈는 한때 돈독한 사이였으나, 철학적 차이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장 차이로 인해 결국 결별했다. 특히,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가 둘 사이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만약 까뮈가 사고사로 46세에 요절하지 않고 더 오래 살았다면, 그의 철학에 어떤 변화는 없었을까? 또한, 사르트르와 까뮈가 끝까지 철학적 논쟁을 지속했다면, 실존주의는 또 다른 방향으로 확장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부조리함'에 관한 견해가 <구토>를 읽기 전과 후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 책의 주인공 로캉탱은 역사 연구를 하는 작가로서 드 로르봉 후작에 관한 역사를 집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어느 날 로캉탱은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역사는 이미 지나가고 '죽어버린' 것이라고 느끼게 되면서,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에 대한 사유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 '실존'적인 느낌이 불현듯 로캉탱에게 휘몰아치고, 그는 구토증을 느끼게 된다.


로캉탱의 '실존' 감각에 대한 불안과 구토증은, 마치 시각 장애인이 처음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순간의 충격과도 같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노미 상태, 그것이 로캉탱의 '실존'감각에 대한 불안과 구토증이다.

이로써 로캉탱은 사물을 비롯한 인간이 '실존'의 한 형태로 존재할 뿐이고, 실존은 인간이 '인식'하는 것에 앞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우리는 사물의 존재를 바꿀 수 없지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지는 온전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구토>를 통해 인간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되,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할 것인지에 따라 우리의 본질을 규정할 수 있고,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소설 속에서 독서광이 자신이 사회주의자이며 휴머니스트라고 로캉탱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하고 실천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을 통해 존재를 창조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구토>를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8년에 발표했다. 당시 유럽은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으며, 이는 작품 속 불안과 실존적 위기에도 반영되었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의 여파로 존재가 흩어지는 강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독서광이 부정한 짓을 저지르는데 오히려 이를 도와준 로캉탱의 모순적 모습은 이미 망가져 있는 도덕체계를 넘어설 수 있는 인간의 실존에 대해 깊이 고민한 대목이다.


"그를 변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도덕? 정의? 이제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로캉탱은 부정한 짓을 저지르는 '독서광'의 행동을 비판하지도, 적극적으로 돕지도 않으며,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작품에서 등장인물의 행동을 통해 선택에 대한 책임과 더불어 도덕관념에 대한 한계를 나타낸다. 사르트르는 도덕적 해이가 가득한 세계에서 도덕성만을 기준으로 어떤 것을 판단하기에 분명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이는 실존적 자유 속에서 선악의 기준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종의 '도덕관념'의 부재다.


따라서 로캉탱이 부정한 짓을 저지른 자를 도와주는 행동은 로캉탱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나타낸 것이고, 이는 사르트르가 그의 다른 저서 <존재와 무>에서 언급한 '나쁜 믿음'의 전형이다. 이후 부빌을 떠나는 로캉탱을 통해 '선택에 대한 결과를 오롯이 책임지는 것'으로 나타냈다.


사르트르는 부조리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안에서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다. 우리는 부조리함 속에 놓여 있지만, 각 개인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의미'를 만들 수 있다. 선택은 개인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동반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판단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든다.

이렇게 보니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고 표현한 니체의 말과는 결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니체는 인간이 기존의 '가치 체계를 해체'하고 '스스로를 초월'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로운 선택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며, 이를 통해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보았다. 니체는 해체를 통해, 사르트르는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인간이 각자의 가치를 창조한다고 보았다.


사르트르의 삶은 고난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며 자랐고, 자신의 외모에 극도로 혐오를 느꼈으며, 체제에 구속받지 않기 위해 노벨상을 거부했던 자 사르트르.

삶의 짙은 그늘을 가지고 있었던 사르트르의 작품 <구토>는 그가 부조리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싶었던 인간의 부르짖음이었을까? 혹은, 부조리를 직면하는 실존적 불안의 기록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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