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2025년 5월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 전쟁은 지정학적 이해관계라는 명확한 표면적 이유를 갖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러시아 민족주의라는 더 깊은 사상적 기반이 깔려 있다. 러시아의 저명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또한, 이러한 민족주의 사상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하나의 러시아 민족으로 여기며, 정신적 통합의 필요성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모순적인 점은 그가 스탈린의 체제를 강도 높게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권위주의적 폭력을 정당화한 푸틴을 ‘러시아의 무질서를 수습한 지도자’로 평가하며, 강한 국가를 위한 지도력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솔제니친은 소련체제를 비판한 작품으로 노벨상 작가가 된 이후 자국을 떠나 스위스로 망명하여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의 자유화를 목도했고, 미국이 무질서한 자유를 방임하며 도덕성이 무너지고 있다며 비판한다. 그는 러시아가 오직 강한 도덕성과 영적 전통을 지닌 민족만이 실현할 수 있는 이상 국가의 중심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나 공산주의와는 다른, 도덕적 지도자가 이끄는 공동체적 국가를 러시아의 이상으로 제시했다.
솔제니친은 군 복무시절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스탈린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며 8년 강제 노동형과 3년 유형을 선고받고 수용소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 시기 수용소 생활의 경험은 <이반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반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주인공 슈호프는 매우 양심적인 인물이다. 철저히 제한된 자유, 과도한 노동,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수용소는 하나의 완결된 사회처럼 작동한다. 수용소 내의 죄수들은 모두 같은 조건의 죄수들이지만 상황에 따라 계급적 차이가 발생한다. 밀고하는 자들과 뒷돈으로 간수들의 배를 채워줄 수 있는 자들은 특별대우를 받았다.
슈호프는 경제적으로 풍족한 편도 아니고, 밀고를 하는 비양심적인 행동도 원하지 않는다. 그는 하루치 빵을 몇 조각으로 나눠 이불 밑에 숨겨두고, 다음날 아침의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고요한 사투를 벌인다. 발가락에 동상을 입지 않기 위해 덧댄 누더기 옷에 일부를 떼어 끊임없이 고쳤다. 다만 하나의 조그만 빵을 더 배식받기 위해 가진 자들의 심부름을 대신해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솔제니친은 ‘슈호프’를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불만을 품으려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인간으로 그려냈다. 슈호프는 솔제니친이 원하는 ‘이상향의 인간’이다. 부당함 속에서도 자신의 도리를 지키며,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인간은 신의 모습과 다름없으며 그는 결국 신에게 구원받을 것이라는 종교적 가치관의 맥락을 띠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원적 개념은 철저히 내면적·초월적 차원에 머물 뿐, 슈호프가 처한 현실 구조의 부조리를 전복시키지 못한다.
결국 그의 구원 서사는 솔제니친의 도덕적 인간상에 대한 신념을 반복해 보여줄 뿐, 현실 구조를 변화시킬 윤리적 동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솔제니친이 주장하는 도덕성이란 무엇인가? 그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내적 기준을 갖고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를 포함한 도덕 절대주의자들에 의하면 도덕은 시대나 담론을 초월한 영원하고 초월적인 원리로 여겨진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도덕은 초월적 진리라기보다, 역사적 맥락과 권력관계 안에서 구성된 담론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우리가 인간 본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하나의 역사적 담론 안에서 구성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 같은 공동체주의자들 역시 보편적 인간 본성이 실제로는 특정 역사, 문화, 맥락의 산물이라 지적한다. 노예제, 할례의식, 명예살인, 그리고 수많은 종교전쟁은 각자의 사회와 체제 내에서 자행된 도덕성의 강요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솔제니친은 그의 작품을 통해 러시아의 체제를 비판했고,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역시 비판했다. 그는 러시아 민족주의를 주장하며, 종교적 양심에 따르는 도덕적 이상을 실천하는 강한 러시아를 원했다. 이러한 국가를 위해 도덕적 질서를 강력하게 바로 잡을 수 있는 지도자를 원했으나 폭력과 전쟁은 반대했다. 그러나 그의 발언과 사상에는 너무나 많은 모순점들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민족주의는 자주 폭력과 분리되지 않았으며, 그 이상이 실제로 평화롭게 실현된 사례는 드물다. 또한, 그가 정한 ‘도덕’ 질서의 정의 역시 분명하지 않다.
솔제니친의 사상은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에서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그가 주장한 러시아 민족주의와 도덕적 질서가 푸틴의 전쟁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 주는 것은 아닐까?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솔제니친은 자신의 이상이 현실에서 폭력과 배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한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