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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

토마스 만, <베네치아에서 죽다>를 읽고

by 기록하는 인간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유려하고 정제된 작품을 써낸 명망 높은 작가이며, 대중들은 그를 지고의 예술을 추구하는 도덕적 삶의 표본처럼 여긴다. 존경받는 작가 '아셴바흐', 중년의 나이에 그가 이룩한 삶이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그의 무의식 속에서 비틀어진 도덕성과 윤리성이 배태되고 있었다는 것을. <베네치아에서 죽다>는 도덕과 본능의 충돌,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 그리고 억압된 욕망이 어떻게 한 인간을 무너뜨리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금지된 것은 왜 더 강렬한가?


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 왜일까? 바로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자유'는 억압받을 때 비로소 그 본질을 드러낸다.


토마스 만이 이 작품을 집필한 1911년의 독일은 정치적 자유화를 이뤄가던 주변국들과 달리 강력한 군국주의적 질서 속에서 사회적으로 매우 억눌려있었다. 자유의 제한은 사고의 제한과도 연결된다. 토마스 만은 억압적인 사회가 강요하는 도덕성과 자율성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 것은 아닐까?

토마스 만

더불어 이 작품은 실제로 토마스 만이 부인과 베네치아 여행 중 만난 남자아이에게 느낀 기묘한 감정적 경험에서 얻은 영감으로 쓰인 것이다. 남자가 남자아이에게 느끼는 애정을 넘어선 사랑의 감정은 당시 독일의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었다. 이러한 주인공의 내밀한 심적 방황 역시 당시 독일의 시대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준다.

영화 <베네치아에서 죽음>의 한 장면, 글을 쓰는 아셴바흐

작품의 주인공 아셴바흐는 고위 법관의 아들로 태어나 엄격하고 단정하며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는 교양 있는 삶, 높은 도덕성을 추구하며, 작가로서 글을 통해 숭고한 아름다움을 이루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정형화된 삶에 대한 지루함, 예술에 대한 회의감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로써 '만들어진 삶'에 대해 일탈하고 싶은 강한 욕구가 분출되기 시작하고, 아셴바흐의 삶이 완전히 뒤바뀐다.


일탈의 신 헤르메스, 그리고 늙은이를 향한 혐오


어느 날, 아셴바흐는 헤르메스를 닮은 방랑자를 조우하게 된다. 그와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았지만, 아셴바흐는 헤르메스를 꼭 닮은 그에게서 일탈의 달콤한 유혹을 느끼게 된다.

헤르메스.

방랑자의 신이자, 죽은 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신.

그는 아셴바흐에게 죽음으로 가는 길을 안내한 것일까? 아니면, 그가 살아온 세계를 부수고 새로운 세계로 가고 싶어 했던 몸부림이었을까?


이 장면은 단순한 만남을 넘어, 그의 내면 깊숙이 잠재된 욕망을 처음으로 의식하는 순간이다.


이후, 그는 베네치아로 향하는 배에서 젊은이들 틈에 끼어들려는 한 늙은이를 혐오한다. 여기서 아셴바흐의 양가적 감정이 드러난다. 그 늙은이는 나이 들어 쭈글쭈글한 피부를 가졌지만, 젊음을 흉내 내고 있었고, 아셴바흐는 이를 "천박한 모습"이라 여기고 경멸한다.



그러나 정작 그 혐오의 대상은 자신이었다. 그는 젊음을 동경했지만 늙었고 그것을 욕망하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늙은이를 혐오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적 ‘투사(projection)’ 기제다. 우리는 우리가 억압한 감정을 타인에게서 발견하고, 그것을 혐오한다. 아셴바흐는 자신을 "고결한 예술가"라고 믿어왔지만, 그가 혐오한 늙은이는 바로 그가 될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는 이제, 금지된 욕망 앞에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토마스 만은 '방랑자'와 '못난 늙은이'를 통해 아셴바흐의 가식을 벗기고, 그의 본능을 직면하게 만든다.

외적인 아름다움은 정신적 아름다움을 넘어설 수 있는가?
베네치아에서 타지오(Tadzio)를 만난 순간, 아셴바흐의 삶은 완전히 뒤흔들린다.

금발에 여리한 몸매,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지닌 그는 마치 그리스 신화를 떠올리게 하는 소년이었다.


아셴바흐는 평생 교양 있는 삶, 절제된 삶을 글로써 승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그의 아름다움은 "정신적 아름다움"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타지오 앞에서 완벽하게 패배하고 있다. 타지오는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모든 가치를 무너뜨린다. 타고난 아름다움이, 그가 평생 쌓아온 예술적 아름다움을 압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아셴바흐는 심각한 혼란을 겪는다.


그렇다면, 그가 평생 믿어온 예술과 도덕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처음으로 스스로의 신념을 의심하게 된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의 대화를 통해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파이드로스여, 아름다움만이 사랑스러운 동시에 눈에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 명심해라! 아름다움만이 우리가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감각적으로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정신적 형태이니라.... 아름다움은 감각이 정신적인 것에 이르는 길이다. "



그는 타지오를 애정의 감정으로 단순히 바라보는 것을 넘어, 그를 뒤쫓고,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치장하며, 그의 시선을 즐겼다. 그는 결국, 타지오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정신적 차원으로 승화하지 못했다.

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


우리는 금지된 것을 갈망하고, 그것을 바라볼수록 더욱 강렬하게 원한다. 그러나 그것을 소유하는 순간, 그것이 가졌던 신비로움과 가치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끝없이 금지된 것 앞에서 갈등한다.


토마스 만은 『베네치아에서 죽다』를 통해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딜레마를 표현하고자 했다. 도덕은 무엇인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 정당한가? 이 모든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혼란한 시대 속에 날카롭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죽음은 도피일까, 해방일까?


아셴바흐는 죽음을 택한다. 전염병으로 인한 감염이었지만 그는 전염병을 피해 도망갈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선택인 것이다. 본능을 깨달은 이상,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도덕의 붕괴를 감당하지 못한 도피였을까

아니면, 욕망의 실현에 대한 해방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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