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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의 미학, <스토너>

존 윌리엄스, <스토너>를 읽고

by 기록하는 인간


뒤늦게 발견된 보석 <스토너>, 아니 원석이라고 해야 가깝다. 소설을 읽다 보면 전쟁세대 작가들의 특유의 문체, 건조함이 잘 드러난다. 작가는 스토너가 겪는 혹독한 시련들을 무미건조하게 써 내려간다. 그래서 먹먹한 감정이 배가된다.


전쟁을 겪었던 작가들의 책을 읽다 보면, 그들의 피폐한 감성이 나에게 강력하게 전이되곤 한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을 아무런 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간접적인 경험으로도 이렇게 감정이 소모되는데,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땠을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작가 존 윌리엄스도 그들 중 하나였으리라.

작품 속 주인공 스토너의 인생은 순탄치 않다.
살 만하면 시련이 찾아오고, 엎친 데, 덮친 격, 첩첩산중으로 어려운 일이 끊임없이 닥친다. 이 작품의 백미는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스토너'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데 있다.


그 누구에게라도 인생은 <스토너>처럼 굴곡이 많고 거친 협곡과도 같다. 그리고 종종 우리는 100가지 중 한 가지의 행복한 기억을 간직하며, 인생은 살만한 것이라고 위로하며 살아간다. 아무리 봐도 인생은 좋은 일보다 그저 그렇거나 재미없거나, 끔찍한 일이 대부분인데 말이다. 생각보다 이렇게 엉망인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도대체 어떤 태도가 가장 합리적일까.


나는 스토너를 읽으면서, 까뮈의 <이방인>과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가 떠올랐다.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그들의 대처가 다소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존 윌리엄스가 표현한 주인공 스토너는 이방인의 뫼르소와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에 비해 매우 수동적이다. 뫼르소와 한스는 부조리에 맞서 일탈을 택하고 부정하는데 반해, 스토너는 받아들이고 견뎌낸다. 부조리한 생을 반목할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이 책의 정수는 다음 문장과 같다.

"아버지가 가엾어요. 편안한 삶이 아니었잖아요. 그는 잠시 생각해 본 뒤 입을 열었다.
"그랬지. 하지만 나도 편안한 삶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스토너>중 발췌-

편안한 삶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고통으로 학습된 자신의 인생에 대한 방어적 기제일 수도 있다. 그것이 스토너의 선택일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부조리한 불행이 쌓이고 쌓여 지친 인간상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렇게나 우리 앞에 놓인 삶을 '견디는 태도'만큼은 다분히 수행자적이고 고결한 행위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고요한 수행자처럼, 속세에서 벗어나지 않고 속세의 풍파를 견디며 자신의 삶을 살아냈다. 그렇다면, 스토너는 진정한 수행자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세상의 불합리를 체념한 것일까?

스토너는 편안한 삶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그의 딸에게 말했다. 스토너의 태도는 단순한 체념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온전히 받아들인 깨달음의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에 대해, 바꿀 수 있는 부분은 나의 '태도' 다. 그렇다면, 스토너처럼 주어진 삶을 '견딜 것'인가 '반목할 것'인가.

결국, 삶의 본질은 태도에 있다.
그 선택 앞에서,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스토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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