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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민경 Jan 04. 2022

변곡점, 오히려 좋아

앤디 그로브의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최근 TV를 보다가 우연히 광고 한 편에 마음을 뺏겼다. 감성적인 도입부에 애플 광고인 줄 알고 보았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자동차 광고였다. 유튜브로 찾아보니 60초짜리 영상이 있었고, 흥미롭게 시청했다. 스토리를 대략 설명해본다.


유치원생 나이로 보이는 손녀가 할아버지 집에 오랜만에 방문한 에피소드다. 손녀는 마치 AI 스피커에 명령하듯 허공에 대고 “음악”이라고 외치지만 할아버지 집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다음 턴테이블의 바늘로 광고의 시선이 이동한다. 손녀는 턴테이블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본다. 턴테이블 바늘을 알 턱이 없다. 할아버지는 바이닐 위에 자연스레 바늘을 올려 음악을 트는 방법을 보여준다. 손녀는 관심이 없다. 그다음 손녀는 할아버지의 브라운관 TV로 향한다. 두 손으로 좌우 화면을 연신 쓸어보지만 (마치 아이패드 위에서 스와이프하듯) TV가 켜질 리가 있나. 그런데 갑자기 켜진다. 손녀는 TV 전원을 켰다고 착각하며 성취감에 미소를 짓지만 사실 할아버지가 리모컨으로 한 것. 이젠 손녀가 부엌으로 뛰어가 식탁 조명 아래에서 박수를 친다. 그 광경을 본 할아버지가 스위치로 조명을 킨다.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장면이 이 광고의 화룡점정. 손녀가 흰색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아무 말 없이 노는 장면. 할아버지가 옆에 있는 빨간 차를 집어 들고는 “부릉부릉” 소리를 낸다(자동차는 원래 부릉부릉 아닌가). 손녀는 좌우로 고개를 젓는다.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몇 번을 시도하지만, 손녀는 모르겠다는 듯 그저 웃는다. 갑자기 벨소리가 울리고, 광고는 손녀가 차량을 타고 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에 “The future is electric”이라는 문구가 뜨고, 할아버지의 시선은 “부릉부릉” 작은 빨간 자동차로 향한다. 손녀가 갖고 놀던 차는 사실 볼보의 전기차 XC40 리차지의 미니어처였던 것. 짧지만 볼보가 지향하는 미래, 즉 변곡점에 대한 자세를 보여주는 광고였다. 내연 기관 자동차의 시대가 가고, 전기차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 할아버지 손 위에 올려진 과거의 자동차는 볼보만의 숙제처럼 느껴진다. 볼보는 2025년까지 전체 생산량에서 전기차 비율 50%를 달성하고 2030년까지 100%를 끌어올린다고 하니, 정말 선언에 걸맞은 광고다.


인텔의 전설적인 CEO 앤디 그로브가 1988년에 쓴 책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를 읽었다. (앤디 그로브는 1968년에 인텔에 합류했고, 1987년에 CEO가 되었으며, 1997년부터 2005년까지 CEO와 회장을 겸임했다). 30년도 훨씬 넘은 책이라, 아직도 유효할까 의문이 있었지만, 우려는 커녕 오히려 코로나 위기와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한 변곡점의 시대에 딱 맞는 메시지였다. 시대는 다를지언정 '전략적 변곡점 (Strategic Inflection Point)'을 마주하고, 대처하는 자세는 과거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었다. 책을 읽다가 1985년부터 2013년까지 인텔의 역사를 보여주는 광고 영상 모음을 보았다. "Intel Computer Inside"에서 "Intel Inside", "Intel Pentium Inside", "Intel Core Inside" 등의 캐치프레이즈를 거쳐 그저 어떤 수식어 없이 "Intel"로 우뚝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변곡점을 거쳤을까.


이 책의 이야기는 1994년 늦가을 인텔의 대표 상품인 펜티엄 프로세서에서 발생한 문제와 관련된 사건에서 시작된다. 이 사건을 겪으며, 저자는 이렇게 회고한다. "문제는 규칙이 바뀌었음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새롭게 등장한 규칙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중략) 모든 사업은 암묵적인 규칙에 따라 운영되는데, 그 규칙은 때때로 아주 심각한 수준으로 변모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경고등은 없다. 예고 없이 서서히 다가와 우리를 덮친다." 책의 제목이 사실상 이에 대한 해결책을 단 한 문장으로 축약한 것은 아닐까. 실은 변곡점이라고 하지만, 앤디 그로브는 변곡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략적 변곡점에서 '점'이라는 말은 사실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점이 아니라 길고도 고통스러운 투쟁 과정이다." 편집광이 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변곡점에 마주할 때 산업을 이끄는 리더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에 영광에 기댈 것인가, 변곡점에서 새로운 산업을 리딩할 것인가. 변곡점을 대하는 자세에서 바로 갈리지 않을까. 유행하는 말로, 이 책을 마무리하고 싶다. 어차피 기업에, 사업에, 또 개인에게 변곡점은 찾아온다. 그때는 이렇게 대처하자. "변곡점, 오히려 좋아." 편집광이라면 결국 위기를 기회로 만들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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