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민경 Mar 12. 2022

머물며 견디는 것의 힘

손석희 <장면들>

좋아하는 각본가 겸 감독인 아론 소킨의 <뉴스룸> 시즌1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 Will McAvoy: What does winning look like to you?

- Mackenzie MacHale: Reclaiming the fourth estate. Reclaiming journalism as an honorable profession. A nightly newscast that informs a debate worthy of a great nation. Civility, respect and a return to what's important; the death of bitchiness; the death of gossip and voyeurism; speaking truth to stupid. No demographic sweet spot; a place where we can all come together.

나락으로 떨어지는 저널리즘의 위상을 제4계급의 위치로 되찾는 것이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의 사명이어야 한다는 점. 내겐 깊은 울림을 주는 대사였고, 손석희의 <장면들>을 읽으며 미국 드라마 <뉴스룸>을 계속 떠올리게 되었다. 손석희의 뉴스룸 시절에 벌어진 굵직한 "큰"사건들을 위주로 회고하고, 저널리즘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월호, 태블릿 PC, 대선, 미투 등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다시 마주하니,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는 게 쉽지는 않았다. 무거운 사건 아니었는가.


손석희의 장면들은 그가 미네소타에서, 전 직장에서, 현 직장에서 정립한 저널리즘의 정의를 곱씹으며 실천하는 이야기다. 특히 레거시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는 시대에 레거시 미디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계속해서 곱씹는다. 알짜는 주로 그가 달아놓은 사족에 있었고, 그에 대한 평은 많이 갈리긴 하겠지만 언론인으로서의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특히 나는 언론의 역할에 대해 서술한 부분 감시견(watch dog)/애완견(lap dog)에 대한 부분이 좋았고, '저널리즘을 위해 운동을 할 수는 있어도, 운동을 위해 저널리즘을 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오랜 주장도 맘에 들었다.


이 에세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책의 서문에서 '어젠다 키핑(Agenda Keeping)'이라는 저널리즘의 한 방법론을 언급하는데, 이를 풀어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미디어가 단지 의제를 세우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의제를 꾸준히 지켜냄으로써 선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그것과는 좀 다른 얘기다. 다만, 실제로 적는 한, 이상적이고도 취약한 주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을 수밖에 없다." 어젠다 키핑을 추구하면서 겪었던 부단한 시행착오 또한 이 책에 함께 기록되었다. 순수한 예술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기업의 광고를 먹고사는 곳이기에 그가 추구하려는 어젠다 키핑은 늘 구조적인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그렇지만 희망을 찾게 된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손석희는 어젠다 키핑의 힘을 믿었다. '도구'임을 인정하고, 그 '도구'가 '좋은 도구'였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그가 일관되게 '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시청률도 중요하고, 단기적인 수익도 중요하긴 하지만 적어도 품위는 지키자는 것.

"나는 공영방송인 MBC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그 MBC 역시 시청료가 아닌 광고로 먹고사는 회사였기 때문에 '장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는 그대나 지금이나 내가 그 '장사'의 '도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좋은 도구'였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사회 변화에 선한 일조를 한다면 적어도 비아냥의 대상은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다."


어젠다 키핑을 생각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어 단어 "abide"가 생각났다. 머물며 견딘다는 말. 올 초에 읽었던 <두 번째 산>에 나왔던 단어다. 세상에 사건 사고가 얼마나 많아, 큰 자극만큼이나 잊히는 속도도 가속화되었다. 챙겨야 할 것도 너무 많고, 점점 중요한 가치를 잃고 사는 때가 많아졌다. 그런데 <장면들>을 읽어보니, 적어도 손석희가 있었던 JTBC 뉴스룸에서는 끈질기게, 머물며 견뎌줬다. 진실에 다가갈 때까지 멈추지 않고, 나아가 줬다. 그래서 그가 말한 어젠다 키핑을 머물며 견디는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덕에 우리 사회에서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 아닌가. 도구로서 남지 않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 이 책에서 많이 배웠다.

그때는 결정해야 했다. 감정은 사그라지고 논리만 남아 있을 , 그마저 닫아버리면 어찌 되는 것인가. 우리 사회에는 감정도  남고, 논리도  남는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분명히 존재하는 어젠다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있는, 언론이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을  같았다. 껍데기만 남는 것이다. 그러면 ( 격한 표현이긴 하지만) 기자들은 어디 가서 앵벌이 해오는 것밖에  되는  아닌가. 그래서 적어도 논리적으로 우리가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이 되는  계속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언제 끝낼 것인가. 이에 대해선 사실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언론이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기억해준다면 된다고 생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