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생각하며-
<멋진 신세계>에서의 문명사회는 의도적으로 계급사회를 만들어 사회 구성원을 계급 속에 주저앉힌다. 피지배계급이 알파 계급으로 올라가는 상상조차도 못하게- 의문을 던지는 게 불가능하고, “생각하는 것”자체가 특권인 세상.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일합니다. 우리는 누구 하나라도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엡실론들까지도 쓸모가 있습니다. 우리는 엡실론들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일합니다. 우리는 누구 하나라도 없으면 살아갈 수가…….” 레니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느꼈던 공포와 놀라움의 충격을 떠올렸다. 그리고 반 시간 동안 멍하니 깨어 있다가, 끝없이 반복되던 어휘들에 최면이 걸려 서서히 마음이 가라앉고, 점점 편안하고 차분해지더니, 슬그머니 잠이 찾아오던 순간을 기억했다…….
“내 생각에 엡실론들은 자기가 엡실론이 되었다는 걸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양이에요.” 그녀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물론 개의치 않죠.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들은 다른 신분이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도 못하는데요. 우리들이라면 물론 못마땅해하겠지만요.
<멋진 신세계> p.128
오늘 독서토론 때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집에서 다시 오늘 토론 내용을 곱씹다가 우리 할머니 세대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나의 할머니는 1930년대생. 1940년~50년대 여자가 고등교육까지 받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 할머니의 10대 후반부터 20대 시절은 교육 대신 집안일, 농사, 돌봄 노동으로 채워졌다.
<멋진 신세계>에서 사회의 허드렛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은 본인이 얼마나 부조리하게 태어난 지 자각하지 못한다. 그저 체제의 부품처럼 지내고, 죽을 때까지 소비하고, 죽어서도 하나의 부품으로 남는다. 그래도 저 세계의 엡실론들은 자각이 불가능하지만, 울 할머니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마치 멀쩡히 살아있는데 생매장당하는 기분이 아닐까? 어쩜 엡실론보다도 못한 처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배움이 한으로 남았던 할머니가 평생교육원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셨다. “여자가 배워서 뭐하게? 여자가 학교 가서 뭐하게? 여자가 출세해서 뭐하게?”우리 할머니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하고, 주저앉힌 가부장제를 완전히 깨부수기 위해 계속 목소리 내고, 균열을 내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