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자정리 #2
요즘 사람들에게 첫 번째 선생님을 떠올리라고 하면 대부분 유치원 선생님을 떠올리지 않을까.
물론 나 때도 유치원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꼭 거쳐야 하는 교육 과정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워낙 교육열이 강하다 보니 안 보내기도 뭐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 시절엔 엄마들 대부분 가정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유치원에 꼭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했던 것도 아니고. 나의 부모님은 나를 유치원에 보내는 대신 뭔가 특별한 걸 배우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날 웬 난데없는 피아노 한 대를 사 주셨다. 그럼 내가 "우리 아빠 최고!" 하며 아버지 볼에 뽀뽀 세례를 퍼붓고 기뻐서 방안을 방방 뛰어다니고 그랬을 것 같지?
하지만 난 전혀 그렇지 않았다. 좀 어안이 벙벙했고,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게 7살 되던 때쯤으로 기억하는데, 솔직히 어렸을 때야 자기 똥도 진흙인 줄 알고 가지고 논다지만 벌써 7살 정도면 사물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파악이 돼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저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 건지 안 될 건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부모님껜 죄송하지만 나에게 도움이 될 물건은 아니었다. 그 시절 피아노 한 대 값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모르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분명 싸지는 않을 것이고 뭐든지 비싼 물건은 다 나에게 이로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오히려 비싸기 때문에 나에겐 빼도 박도 못하는 물건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나에겐 피아노였다.
피아노가 우리 집 대문을 통해 들어오던 날 새까만 것이 크기도 컸지만 저것이 나의 자유를 저해하는 족쇄가 될 거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예쁘게 태어났기 때문인데 할 수만 있으면 얼굴을 뜯어고쳐서라도 못 생기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버티고 참아내는 것 밖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비해 다른 사람들은 집에 피아노가 들어온다고 좋아했다. 특히 나 보다 4살 위인 언니는 나에 대한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나 보다 네 살이 많다고 해도 아직 초등학생에 불과하다. 나도 자식인데 왜 쟤를 위해서만 피아노를 사 주고 나는 없는 거냐고 방안을 떼굴떼굴 굴러도 아버지와 엄마는 아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랬다면 언니에 대한 대우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또한 나는 좀 착한 동생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버님, 어머님, 소저 생각해 보니 그동안 부모님 그늘에서 온갖 좋은 것만 누리고 살았나이다. 저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려는 아버님과 어머님의 생각은 백골난망이오나 이번만큼은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배우게 하심이 어떠하올런지요. 언니가 저리 게거품을 물고 방안을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이 심히 보기가 민망하고 옵니다."
그랬다면 나도 모처럼 착한 동생이 되면서 동시에 끈끈한 자매애를 거미줄처럼 펼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언니는 끝까지 부러워는 해도 그런 어린아이다운 꼴사나운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언니를 깔보고 무시하고 버릇없이 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언니는 피아노가 들어오던 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피아노에 욕심을 내면 자유가 없어진다는 걸 언니도 직감했던 것 같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나는 욕심을 내지 않았는데도 자유를 잃었고, 언니는 욕심을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유가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역시 언니는 순진한 것 같아도 은근 똑똑한 데가 있었다. 실제로 언니는 피아노를 나 보다 좋아했고 훨씬 자유롭게 쳤다. 자신이 치고 싶으면 쳤고, 치고 싶지 않으면 치지 않았다. 물론 대신 잘 치지는 못했다. 그에 비해 난 적어도 언니보다 잘 치긴 했지만 절대로 피아노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 내가 그렇게 어린 나이게 자유를 속박당하며 좋아하지도 않는 피아노를 쳐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매일 피아노를 배우러 대문 밖을 나서는 것도 싫었고, 가까운 샛길로 갈 수 있는 길은 지랄 같은 똥개 한 마리 때문에 멀리 돌아가야 하는 것도 싫었다. 그때는 또 공교롭게도 정명훈과 백건우가 쌍벽을 이루며 세계 음악계를 들었다 놨다 했는데, 아버지와 엄마는 그들이 TV에 나오면 너도 저런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러면 난 팔뚝에 닭살이 쫙 돋으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정말 그때마다 쥐구멍을 팠다면 우리 집은 폭우 한 번에 다 떠내려갔을 것이다. 하다못해 한동안 피아노를 조율하러 온 사람이 젊은 남자였다. 조율한답시고 피아노를 어찌나 잘 치던지. 정명훈이나 백건우는 고사하고 저 아저씨만큼만 쳐도 좋겠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했는지. 하지만 다행히도 그를 빗대서는 뭐라고 하진 않았다. 조율사는 조율사일 뿐 피아니스트는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도 절대 음감인지 아니면 서당 개 정도는 되는 건지 나는 덕분에 귀가 민감해졌다. 어디서 무슨 음악만 들으면 저건 피아노로 어떻게 치겠구나 하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 들어가서는 음악 시간에 무의식 중에 책상 끄트머리를 피아노 건반이라고 생각하고 손가락으로 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너 피아노 있구나."라며 알은척을 했다. 그러면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곤 했다.
그건 엄마의 영향이 컸다. 엄마는 나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했으면서 피아노가 있다는 것이 남에게 알려지는 걸 극히 꺼려했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엄마가 그러니까 나도 우리 집에 피아노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렇게 발뺌을 하는 수밖에. 하지만 피아노는 몸으로도 쉽게 가려지는 물건이 아닌데 엄마는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게 그렇게 부담스럽다면 아예 처음부터 피아노를 사질 말았어야 했다. 나에게 가르치지도 말고. 그랬다면 나의 운명도 달라졌겠지. 아무튼 엄마는 그냥 그런 식으로 우리 집이 부자로 알려지는 게 싫다고 했다. 피아노가 있으면 부자라는 건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난 우리 집이 그렇게 잘 사는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기와집에서 사는 평범함 집안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잘 사는 집안이라면 그때 막 이층 양옥이 서서히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적어도 그런 집에 살 정도는 돼야 부자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난 이 청각의 민감성 때문에 굳이 피아노를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연습을 하지 않아도 그 곡을 어떻게 치는지를 아는데 연습을 왜 한단 말인가. 나는 어떻게든 연습 없이도 선생님 앞에서 피아노를 잘 쳐 보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번 그렇게 선생님을 속일 수는 없었다. 선생님은 안다. 이 시간 내가 연습을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지 안 하고 앉아 있는지를. 피아노는 선생님이 가르쳐 준대로 똑같이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철저한 연습의 산물이다. 연습을 하지 않으니 제 아무리 청각의 민강성을 가지고 선생님이 가르쳐 준대로 친다고 해도 건반에서 손가락은 꼬이기 마련이다. 연습을 하지 않은 데다가 유리 멘털이어서 선생님이 조금만 혼을 내면 그게 그렇게 서럽고 무서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런 날이면 난 누구에게 화가 났는지도 모르면서 선생님 집을 나올 때 쌀쌀맞게 "내일 안 올 거예요."라고 한마디 던지고 나오곤 했다. 그러면 선생님 역시 쌀쌀맞게 "그래. 오지 말아라." 하고는 내 등 뒤에서 대문을 쾅 닫곤 했다. 그러면 그게 또 얼마나 서럽던지. 내가 선생님한테 이런 대우를 받겠다고 이 미친 피아노를 배워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런 생각을 미처 다 하기도 전에 난 그다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됐다. 어른이라면 친구를 만나던가 술을 마시러 갔겠지만 그때는 우울하다고 달리 갈만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곧장 집으로 갈 수 밖엔 없었는데 내가 선생님께 혼났다는 걸 엄마가 알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난 또 엄마에게 야단을 맞을 것이다. 선생님께 야단을 맞은 것도 서러운데 엄마한테까지 그럴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집에 가는 동안 빨리 눈물을 말려야 했고 엄마 앞에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연기해야 했다.
가끔 엄마는 사과 두 개를 깨끗한 가제 손수건(가볍고 부드러운 무명베로 만든 손수건으로 주로 화장할 때 쓰이곤 한다)에 꼭 싸서 쉬는 시간에 선생님과 함께 먹으라며 피아노 치러 나가려는 나에게 내밀곤 했다. 그것이 선생님께 야단을 맞은 다음 날이라면 확실히 효과는 좋았다. 하지만 그게 피아노 못 치는 딸을 잘 봐 달라는 엄마의 작은 뇌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는 못해봤다.
내가 그렇게 언니에게 못되게 군 것도 성격이 못 되서라기 보단 그때 받은 스트레스를 그런 식으로 표출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선생님은 나의 기준으로 봤을 때 그다지 미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분명 매력적인 분임에 틀림없다. 키도 크고 날씬했으며, 머리도 길었고, 항상 비누인지 향수 냄새가 상쾌하게 났다. 특히 손가락이 길고 예뻤다. 선생님이 피아노를 칠 때면 조그맣게 손톱 부딪히는 소리가 나곤 했는데 난 그 소리가 신기하면서도 좋았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스르르 잠이 올 것만 같았다. 나는 아무리 쳐도 그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피아노를 선생님만큼 노련하게 치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언제쯤이면 그런 소리가 날까 부러웠다.
하지만 난 그때 선생님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피아노를 칠 때 가끔 선생님의 어머니가 멀리서 "옥 O아!"라고 부르시곤 했는데 그때야 비로소 선생님 이름을 처음 알았다. 성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과연 흔치 않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약간 프랑스풍이란 생각도 든다. 록산느가 떠오르는 이름. 나는 선생님의 나이도 어느 학교를 나오셨는지도 몰랐다. 세월이 한참 흘러 가장 최근에 우연히 엄마와 어린 시절을 얘기하다가 비로소 알았다. 엄마는 선생님이 소위 말하는 S대 출신이라고 했다. 난 그때 놀랐다기 보단 약간 움찔했다. 엄마와 아버지는 정말 나에게 최고의 피아노를 가르치려고 하셨구나 싶어서.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무작정 싫다고만 했으니.
그때 선생님은 얼핏 26이나 27쯤 되시지 않았을까. 하지만 정말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때는 20대 초반만 되어도 나이 들어 보이기 시작했고, 대체로 스물 다섯 이전에 결혼을 하는 추세였던 것으로 아는데 선생님은 그때 미혼이었다. 그렇다면 잘해야 스물셋, 넷쯤 되지 않으셨을까.
피아노는 꼭 내가 선생님 댁에 가서 배운 건 아니었다. 어떤 땐 선생님이 집에 오시기도 했는데 그런 때면 엄마는 가끔 선생님이 간단히 드실 수 있는 간식을 내오곤 했다. 그런 때면 엄마와 선생님은 무슨 대화를 했을까. 얼핏 기억하기론 선생님이 교습비를 올려 받으려면 그렇게 출장 지도를 다녔던 것 같다. 그러면 엄마는 눈치껏 알아서 교습비를 올려 주던가 협상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때면 엄마는 한 번씩 내가 피아노에 소위 말해 싹수가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보곤 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뭐라고 대답했을까. 솔직하게 얘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솔직히 난 피아노를 못 쳐 선생님께 야단맞는 날도 많았고, 언제 피아노를 끝내 줄 건지 그 앞에서 몸을 이리 꼬고 저리 꼬기도 많이 했다. 그러니까 난 피아노를 즐겁게 친 적이 없고 누가 봐도 피아노로 대성할 아이가 아니었다. (내가 피아노를 딱 한 번 즐겁게 친 적이 있었는데 그건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배울 때였다.) 하지만 선생님은 엄마 앞에서 그 말을 솔직하게 하지 않았다. 고작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데 연습을 잘 안 해서 그게 참 아쉬운 것 같다고 우회해서 말씀하셨을 것이다. 곧이곧대로 말해서 자신의 위신뿐 아니라 교습비까지 깎는 일은 굳이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또한 선생님이 그 정도만 말씀하시면 엄마는 대충 눈치를 챘어야 했다. 하지만 난 피아노를 이럭저럭 3년 가까이 쳤다. 그건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난 그 세월을 선생님한테서만 배우진 않았다. 나중에 새로운 선생님께 배우긴 했는데, 난 그저 피아노 앞에서 버티느라 선생님과 함께하는 마지막 날이 올 거라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선생님이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그만두겠다고 통보를 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모르긴 해도 둘 중 하나가 아닐까. 결혼을 하거나 유학을 가거나. 아무튼 선생님은 대신 새로운 선생님이 올 거라고 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선생님의 친구였다.
드디어 선생님과 함께 하는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선생님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까 뭔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결국 피아노를 치다가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그것은 눈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 이렇게 마지막 날이 올 줄 알았다면 선생님 앞에서 잘 보일 걸 그랬나. 하지만 난 그때 그런 걸 생각하기엔 너무 어렸다. 선생님과 헤어졌다고 해서 시원 섭섭한 것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다른 선생님께 옮겨져 피아노를 계속 쳐야 했으니까. 그냥 그때까지 난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이 감정이 뭔지 당황스럽기만 했다. 헤어지고 나니 선생님이 그리운 것도 같았다. 마음이 허전한 것 같기도 하고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다음 번 피아노 교습 때 약속처럼 커트 머리를 한 새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시기 시작했다.
난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선생님과 회자정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