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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수집가 Aug 01. 2020

수첩을 잃어버리다

회자정리 #3

 선생님은 언제부턴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언니와 오빠의 공부를 봐주러 우리 집에 오시기 시작하셨다. 선생님은 어찌나 서글서글하고 밝은 인상이신지 함께 있으면 금방 마음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은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다. 선생님은 언니와 오빠를 좋아하셨다. 자랑은 아니지만 언니와 오빠는 같은 또래 아이들 치고 점잖고 의젓하기로 거의 군계일학이었고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 답지 않다고 좋아했다. 그러니 늘 아이들과 씨름하셔야 했던 선생님도 좋아라 하셨을 것이다. 언니와 오빠가 그러니 그보다 어린 나와 동생 역시 그 태가 어디 가겠는가. 어른들이 우리를 보고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도대체 요즘 아이들은 얼마나 청방지축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긴 그 모든 것은 깔끔쟁이로 소문난 엄마 덕이기도 하다. 도무지 지저분한 것을 그냥 보고 넘기는 법이 없으니. 선생님은 엄마와도 친분이 두터워 누가 보면 자매나 가까운 친척인 줄 알 것이다.

 선생님은 다부진 체구에 까무잡잡한 피부, 오종종한 생김새로 조금은 이국적이셨다. 그중 단연 압권은 코였다. 서양 사람처럼 오뚝했다. 외모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언니와 나는 콧대가 낮고 큰 편이었는데 당연 선생님의 코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썩 잘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못하지도 않았는데 생각해 보면 그게 다 선생님 덕분이란 생각을 했다. 기억하기론 나는 과외를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한 것 같다. 그건 아마도 난 그전까지 피아노를 쳤는데 엄마는 내가 과외와 피아노를 병행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긴 1학년부터 과외를 한다면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우리가 학교를 다닌다는 건 과외를 시작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그래도 그중 첫 학년은 교과 보단 학교 적응에 중점을 두는 시기이기도 했으니 과외가 그렇게 급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의 그런 판단엔 선생님의 조언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선생님은 원래 학교 교사셨다고 한다. 그러니 학교 행정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선생님이 교사를 그만두고 과외를 하셨던 건 선생님의 부군 때문이라고 했다. 부군께서 갑자기 무슨 병에 걸려 간호를 해야 해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슬하의 두 아들이 있으니 돈벌이를 아주 안 할 수 없고 궁여지책으로 과외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때는 과외 붐이 막 일기 시작했던 때라 모르긴 해도 한 반에 반 이상은 과외를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서글서글하고 사람 좋은 인상이라면 아이들도 금방 끌어 모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뭐 때문인지 선생님은 (아직) 그런 재주는 없으셨던 모양이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어떻게 엄마와 인연이 닿았던 것 같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언니가 초등학교 고학년이고 오빠도 곧 머지않았으니 엄마로서도 마음이 조금은 급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엄마들의 마음은 똑같지 않을까. 남의 아이들이 다 하는 걸 내 아이는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뒤쳐졌다는 말을 들으면 안 될 테니 그런 필요가 선생님과 통했을 것이다.  

 묘한 건, 엄마는 그렇게 친화력이 좋거나 사람을 끌어 모으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내 아이에게 꼭 과외를 시켜야겠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점잖은 엄마가 시장에 나가 무조건 언니나 오빠 또래로 보이는 아이만 보면 다가가, "야, 너 과외하지 않을래? 좋은 선생님 있는데." 하면 아이들은 별 거부감 없이 엄마한테 물어보겠다고 하고, 그렇지 않아도 과외 선생님을 구하고 있는 중인데 잘 됐다며 엄마를 의심 없이 따랐다고 한다. 이럴 것 같으면 엄마가 직접 과외를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엄마는 공부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는 생애를 사셨던 관계로 그렇게 해서 모인 아이들은 고스란히 선생님께 인계되었다. 그때 이후로 선생님은 아이들 모으는 것을 걱정하지 않으셨니 선생님으로선 엄마가 은인이었을 것이다. 언니와 오빠를 위해 시작한 과외는 뭐 때문인지 우리 집이 아지트가 되기도 했는데 그렇게 해서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나와 동생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처음에 선생님은 나와 동생을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공부에 흥미를 가지라고 학습지 같은 것을 가져와 풀어보게 하셨다. 나중에 넘쳐나는 아이들을 감당할 수 없어 선생님은 결국 당신의 집을 개방하시기도 하셨다. 나도 선생님 댁에 가서 과외를 받기도 했는데 정말 내 또래부터 언니 또래까지 아이들로 바글바글 했다.  

 

 그러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갑자기 몸이 안 좋아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한 달만에 퇴원을 했지만 오른쪽 팔과 다리가 마비돼서 쓰지 못했고, 학교도 당장 갈 수 없어 휴학을 했다. 그때 나는 그 한 달 동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얼떨떨했고, 그 얼떨떨함은 퇴원을 해서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우리 집에 손님들이 많이 왔고, 그들은 하나 같이 애써 나를 위로하느라고 급급했다. 아니 내가 뭘 어떻게 됐다고 이렇게 난리들인 건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내 몸이 예전 같지는 않은 건 알겠는데 오히려 그럴수록 나를 더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도 위로를 많이 받으니 난 정말 불행의 아이콘처럼 연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유일하게 나를 위로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의 형제들과 선생님은 아니었을까 싶다.

 나의 형제들 이래 봤자 언니가 이제 겨우 중학생이고, 오빠와 동생은 아직도 초등학생이었다. 그들은 나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건지, 아니면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고 있는데 우리까지 그럴 필요가 있겠냐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의 형제들만큼은 나에게 특별 대우하지 않았다. 그 점은 정말 고마웠다. 선생님은 어찌 보면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는데, 항상 밝고 서글서글한 분 아닌가. 그런 분이 그 특유의 미소를 걷어내시고 여느 어른들과 같이 나를 대했다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같이 있으면 덩달아 마음이 밝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모르긴 해도 나 보다는 엄마가 더 그러지 않았을까. 선생님 슬하엔 언니와 오빠 또래의 두 아들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오랫동안 아픈 남편을 간호하기도 하셨으니 이제부터 아픈 딸을 보살펴야 하는 엄마를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셨을 것이다. 실제로 엄마는 선생님만 보면 밝게 웃곤 했다. 게다가 몰랐는데 선생님의 아들이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지금은 고쳐서 일부러 말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다. 선생님은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빛바랜 조그만 흑백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셨는데 사진 속엔 정말 나 보다 더 어려 보이는 한 소년이 있었는데 다리 한쪽이 유난히 짧아 보였다. 내가 앞으로 선생님의 아드님처럼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그건 확실히 엄마에겐 적지 않은 위로와 희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처럼 선생님과 우리 집과의 관계는 좀 특별했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그해 가을 우리 집은 이사를 했다. 그에 따라 우린 더 이상 선생님께 과외 공부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우린 그때부터 과외 공부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광희동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때 우리가 살던 곳이 광희동이었는데 이제 우리는 광희동을 떠나왔고 선생님은 여전히 그곳에 계셨으니 엄마의 가르침을 따라 그렇게 불렀다. 그래도 선생님과 우리의 관계가 한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엔 오빠의 공이 작지 않았다. 그때 오빠는 5학년이었는데 전학을 할 법 도한데 이제 1년만 다니면 졸업이라며 굳이 전학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 먼 데를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에 따라 학교가 끝나면 선생님께 과외까지 받고 왔으니 쉬 인연이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사하고 그 이듬해엔 언니와 나는 선생님 댁에 놀러 간 적도 있다. 선생님은 마치 조카라도 온 양 우리를 기쁘게 맞아 주셨고 점심에 저녁까지 극진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선생님과 우리 집은 각별해서 오랫동안 엄마와 통화를 하고 지냈고, 실제로 몇 번 놀러 오시기도 하셨다. 그렇게 선생님은 우리 4남매의 성장을 꽤 오랫동안 지켜 보신 셈이다. 적어도 우리 남매가 30대에 진입할 때까지는 말이다. 


 어떤 만남은 언제 헤어졌는지도 모르게 헤어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만남은 그 헤어짐을 기억하게 만들기도 한다. 선생님과 각별했으니 그 헤어짐을 기억하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 새로 이사한 집에서 25년을 살고 지금의 집으로 이사한 직후다. 

 아무리 각별한 사이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그 25년 동안 선생님과 엄마는 서로 잊을만하면 한 번씩 통화를 하며 지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우리 집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계셨을까. 우리의 학교 진학과 졸업, 언니의 결혼과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오빠가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다가 카페 사장이 되고 그러다 IMF로 집을 팔고 이사하기까지의 과정을 알고 계시지 않았을까. 그래도 워낙에 띄엄띄엄 연락을 했던 터라 우리가 딱히 어느 날 이사한다는 기별도 드리지 못한 채 마음이 분주했다. 여차하면 이사해 놓고 연락드리자고 별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아셨는지 이사를 코앞에 두고 전화를 하셨다. 선생님은 이제라도 알게 된 걸 천만다행으로 여기시는 눈치였다. "어쩐지 왠지 전화를 하고 싶더라니." 하며 특유의 웃음으로 껄껄 웃으셨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마지막 전화를 끊을 때 이사하면 꼭 다시 연락해 달라고 엄마와 나에게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가 선생님을 생각하기보다 선생님이 우리를 더 많이 생각하셨던 것 같다. 게다가 우리가 이사를 한다니 안 그래도 멀어진 느낌이었는데 더 멀어지는 느낌이 드셨을 것이다. 우린 이사하면 꼭 연락드리겠다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약속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엄마와 나는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오래전부터 엄마는 각종 전화번호를 적은 손수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어처구니없게도 잃어버린 것이다. 거기엔 선생님 댁 전화번호도 있었으니 그것을 찾지 못하면 달리 연락을 드릴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손수첩은 나오지 않았다. 이사하고 연락하라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한동안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꼈다. 연락을 드리지 않으려고 해서 안 드린 것이 아닌데 선생님은 아쉬움 반, 원망 반하셨겠지.  

 하지만 글쎄 만일 그 손수첩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지금도 선생님과 연락을 하고 지냈을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몇 번은 서로 연락하며 지내겠지.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모든 만남이 이별하기 위해 있는 거라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멀어졌을 것이다. 지금은 선생님을 못 뵌 지 20년이 넘었다. 모쪼록 어디선가 잘 계셨으면 좋겠다. 변함없이 아이들을 사랑하며 환한 특유의 미소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면서 말이다.


 선생님, 전 아직도 선생님을 잊지 않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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