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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수집가 Jun 21. 2019

선생님, 사과 드립니다

아, 피아노는 정말 싫어

#사과  

선생님께 혼이 나는 날이면 난 집에 갈 때까지 얼굴에서 눈물의 흔적을 지우고, 엄마 앞에서 아무 일도 없던 양 태연하게 행동해야 했다. 내가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마가 알면 나를 강제로 피아노 앞에 앉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건 정말 내가 원치 않는 일이다. 그러니 최대한 연기를 할 밖에.


하루는 엄마가 탐스럽게 익은 사과 두 알을 깨끗한 가제 손수건(일반 손수건이 아닌 가볍고 부드러운 무명베로 만든 손수건으로 주로 화장할 때 쓰이곤 한다)에 꼭 싸서 쉬는 시간 선생님과 함께 먹으라며 피아노를 배우러 나서는 나에게 내밀었다. 


난 왠지 그게 싫지 않았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쉬는 시간에 선생님과 그것을 나눠 먹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전날도 그렇고 그 전날도 나는 선생님께 야단맞을 일을 한 적도 없었었으니까.

 

아니다. 어쩌면 난 그 전날 선생님께 혼이 났을지도 모른다. 어린아이의 기억이란 게 그렇듯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런 것처럼 나는 벌써 선생님과 사과를 나눠 먹을 생각에 전날 무슨 일로 야단을 맞았는지 다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고 그때를 돌이켜 보면, 내가 선생님께 그렇게 패악(?)을 부리고 돌아가는 날 중 적어도 한 번은 선생님이 엄마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엄마가 먼저 전화를 했거나). 그러면 선생님은 고자질 아닌 고자질로 내가 선생님 댁에서 어떻게 하고 지내는지를 엄마에게 소상히 알렸겠지. 그러면서 선생님은 엄마에게 내가 특별히 내색하지 않으면 모른 척하라고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엄마는 그러겠다고 하곤 생각 끝에 선생님과 내가 잘 지내라고, 미천한 딸 맡겨 미안하다는 의미에서 사과를 뇌물을 쓰지 않았을까. 그리고 엄마는 엄마대로 내가 그러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감쪽같이 모른 척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내 연기가 엄마한테 어느 정도 먹힌다고 안심하곤 했겠지.    


 #피아니스트

 그때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정명훈이 매스컴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늘 나도 저런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돼야 한다고 했다. 그때 내가 그 말을 얼마나 듣기 싫어했는지 모를 것이다. 그때 내가 바라는 건 백건우와 정명훈 같은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그 두 이름을 잊을 수 있을까 였다.


그러려면 그 두 이름의 이름이 아버지 눈에 띄지 말고 귀에 들리지도 말아야 한다. 난 그 두 이름만 들으면 도무지 오글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피아노는 나에겐 도무지 악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건 괴물 같은 거다.      

    

영화<피아노의 숲>스틸컷 중에서


#입학식

학교 입학식엔 엄마와 같이 갔다. 그땐 뭐 때문인지 오른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옷핀으로 고정시키고 가야 했다. 학교에선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선 정확한 설명이 없었는데 그땐 아이들이 노란 코를 잘 흘리고 다니니 거기에 사용하라고 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거의 일주일을 바로 교실로 들어가지 않고 운동장에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들어갔던 것 같다. 아마도 우리가 베이비붐의 거의 마지막 세대는 아닐까 싶다. 그 무렵에 산아제한 정책이 있었고 매스컴에선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란 표어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란 보다 더 강력한 표어를 내걸기도 했다. 오늘 날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때 한 반의 인원이 80명이었다.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바글바글 댔으니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까? 더구나 엄마들이 자기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줬다고 해서 금방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복도로 난 교실 창문에 꼼짝없이 서서 지켜봤다가 아이와 같이 하교해야 했다.     


그러니 엄마들은 엄마들대로 복도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경쟁이 치열했다. 80명이나 되는 엄마들이 내 아이가 잘하고 있나 지켜보려면 까치발도 불사해야 했으니 앉지도 못하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중에도 엄마는 그런 경쟁에서 결코 밀리지 않아 비교적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엄마는 내가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할까 봐 열심히 눈짓으로 뭔가의 사인을 보내고 있었는데 난 오히려 그게 뭔지 몰라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때 엄마는 30대 후반이었고 요통을 앓고 있었다. 엄마는 가끔 통증이 심한 날엔 동생에게 허리를 밟고 올라서 있으라고도 했다. 그런 엄마가 내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지켜봐야 했으니 오죽 힘들었을까. 그나마 수업이 길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허리 통증을 앓고 있는 엄마에겐 괴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피아노 조율사

어느 날 웬 호리호리하고 잘 생긴 남자가 우리 집에 왔다. 난 혹시 피아노 선생님이 바뀐 건 아닌가 했는데 그건 아니고, 그는 다름 아닌 피아노 조율사였다. 그가 어떻게 해서 우리 집에 왔는지 알 수가 없다. 피아노를 산 곳에서 보내 준건 아닐까. 아무튼 피아노는 정기적으로 조율을 해 줘야 한다고 들었고, 조율사의 방문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조율은 나름 꽤 오래 진행됐다. 뭐 거기까진 좋았다. 마지막에 조율을 했으니 점검을 해 봐야겠지. 그래서 피아노를 쳐 보는데 피아노를 저렇게도 치는구나 좀 놀라웠다. 하지만 난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백건우와 정명훈을 들먹였으니, 엄마는 피아노 조율사를 들먹이며 저렇게 피아노를 쳐야 하지 않겠냐고 한 소리 하지 않을까 싶어서.   


다행히 엄마는 그 피아노 조율사의 수준급 연주에도 불구하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으로 봐 엄마는 조율사는 피아노를 고치기만 하는 일종의 기술 자지 가르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피아노 조율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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