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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수집가 Aug 20. 2019

내가 먹는 음식이, 나다

#그 해 겨울에서 봄이 오기까지-겨울 동치미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동치미를 유독 좋아하셨다. 해장에 이만한 음식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겨울 동치미란...!


땅속 깊이 파묻은 항아리에 엄마는 해마다 김장을 하면서 동치미를 한 독 그득히 담갔다. 비법이 뭐 그리 있었겠는가? 무와 배, 파 그리고 독을 채워줄 물만 있으면 그만이지. 나도 아버지를 닮아서 물김치류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건 더운 여름의 일이고 겨울엔 생각만큼 많이 먹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철 좋아하셨다.


긴 밤 왠지 입안이 적적하다 싶으면 아버지는 추운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마당으로 나가 살얼음 낀 동치미를 한 사발 퍼 오곤 하셨다. 후루룩 크게 한 모금 마시면 정수리마저 쨍할 정도고, 거기에 큼직하게 잘 익은 무를 서걱서걱 깨물고 나서야 그 밤을 편히 주무셨다. 겨울이 동치미를 위해 존재하는 건지 동치미가 겨울을 위해 존재하는 건지 모르게 봄이 오기까지 아버지는 그 큰 독의 동치미를 거의 혼자 다 먹을 정돈데 동치미가 남아서 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 때문에 먹기 시작한, 녹두 빈대떡

내가 녹두 빈대떡을 처음 먹었던 때가 언제였을까? 아주 어렸을 때였던 것 같다. 아버지가 술을 잡수시고 들어오시던 날 가끔 손에 녹두 빈대떡이 들려있었다. 아마도 지인분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 그 집 빈대떡이 맛있어 식구들이 생각나 사 가지고 들어오셨는지도 모른다.  


정말 맛있었다. 고소하고 느끼하기도 하고, 포만감이 느껴진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엄마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명절날 다른 전들을 부치느라 녹두 빈대떡까지는 여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애들이 되가지고 차례 음식에 참견할 권리는 없었으니 그저 어느 날 그렇게 아버지 덕에 운 좋으면 먹는 거고 못 먹으면 할 수 없는 음식이 녹두 빈대떡이었다. 그런 음식이 어느 때부턴가 명절날 빠지지 않는 음식이 되었는데 그건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였다. 엄마는 그때부터 다른 전은 부치지 않고 오로지 녹두 빈대떡만 했다. 다른 건 다 귀찮다는 것이다. 그것에 이의를 다는 식구는 없었다. 나 역시 빈대떡 하나면 부침류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부침 담당은 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0년 가까이 돼 온다. 그동안 우리가 명절 때 빈대떡을 먹지 않은 건 딱 두 번 있었는데, 어느 해 설 때 그동안 많이 먹었으니 사람의 입맛은 회귀한다고 그동안 빈대떡에 밀린 생선전을 소환하느라 그랬다. 또 한 번은 엄마가 대장암에 걸렸던 그해 추석에. 얼마나 허전하던지. 명절 같지 않은 명절을 보낸 느낌이다. 그러니까 이 음식은 우리 집 대표 소울푸드다. 이걸 아버지 돌아가시자 먹기 시작했다니 아버지가 저 세상에서도 많이 섭섭해하실 것이다. "나 있을 땐 안 먹고, 나 빼놓고 먹으니 좋으냐?" 


그러면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나? "아버지가 안 계신 헛헛한 마음을 달래느라 먹기 시작했어요. 아버지는 다시 살아 돌아오실 거 아니잖아요. 이 모든 게 다 아버지 때문이어요." 하면 이해하시려나? 참,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영감(아버지)이 미워 영감 돌아가자 먹기 시작했다고 오해받을만하기도 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이 없었던, 아버지표 닭볶음탕

아버지와 엄마는 30년을 부부로 사셨고, 그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세월을 싸우며 사셨다. 처음엔 두 분이 싸우면 괴로웠다. 마치 내가 잘못해서 싸우는 것처럼 느껴져 안절부절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슬하의 4남매 중 내가 가장 당신들의 근심을 많이 샀거든. 하지만 두 분의 싸움은 대체로 성격 차이이거나, 시월드와의 문제고 그 시기는 주로 내 사춘기 시절과 맞물려 있었다. 그러니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요즘 말로 남성 혐오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난 조금 크고 나선 왜 아버지는 남자가 되가지고 엄마 하나 품어주지 못하고 싸우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여자보다 강하지 않는가. 엄마가 불쌍하지도 않은가 그러면서 불안 대신 불만을 품었고, 그 불만은 늘 아버지를 향해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아버지를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퇴근해 들어오시면 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걸 보는 나도 마냥 편한 것은 아니다. 두 분이 그만큼 살 비비고 살았으니 알만도 하지 않을까. 똑같이 뾰로통해 있으니 측은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마음이 안 좋았다. 그나마 두 분이 신앙을 갖게 되자 그 싸움도 차츰 잦아들었다는 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앙을 가졌다고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었었다. 한 번은, 평소 같으면 엄마와 아버지가 같이 교회를 갔을 텐데 전날 싸우느라 교회도 따로 갔다. 아버진 오전에 엄마는 오후에. 일찍 교회를 다녀온 아버진 닭볶음탕이 드시고 싶었을까? 교회 예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닭고기를 샀다. 그리고 드시기만 하시고 생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요리를 한다. 서쪽에서 해가 뜰 일이다. 마침 더운 여름이라 아버지는 마당에 자리를 펴고 우리 4남매를 부르시더니 함께 그 닭볶음탕을 먹게 하셨다.


먹게 하실 것 같으면 조용히 먹게 해 주실 일이지 아버지는 어쩌자고 우리들 앞에서 엄마 험담을 들어놓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순간 식욕이 확 달아나고 말았다. 애초에 별로 먹을 생각도 없었지만. 결국 난 엄마를 이해 못하고 험담이나 하는 아버지에게 볼멘소리 한마디를 날려버리고 내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엄마는 죽어도 한이 많아 뼈가 썩지도 못할 거라고.


아, 그 말을 내가 왜 했을까? 아버지는 그때 나로 인해 무안하셨을 것이다. 모처럼 아이들과 밥 한 끼 잘 먹어보려 했는데. 무엇보다 아버지가 닭볶음탕에 처음으로 도전하셨다는 건 엄마와 화해하겠다는 의지의 표명 인지도 몰랐다. 그걸 내가 무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그 속도 모르고,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데 이놈의 입이 방정이었다. 모르긴 해도 아버진 속으로, 너도 별 수 없는 여자구나 했는지 모른다. 20년을 살고, 30년을 살아도 아니 평생을 살아도 다 모를게 남녀 사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도 뭐가 통했을까? 그동안 각을 세웠던 엄마도 교회 갔다 돌아오니 아버지가 닭볶음탕을 해 놓은 걸 알고 나중에 맛을 보더니, "기름을 안 걷어서 그렇지 아버지 제법 하더라." 한다. 난 그때 이후 아버지와 엄마의 싸움에 절대로 끼어들지 않았다. 두 분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두 분의 문제다. 그만큼 같이 사셨으니 싸우고 푸는 방법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걸 괜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콩이야 팥이야 따지고 앉았으니 얼마나 같지 않았을까.


# 죽 이야기

어렸을 땐 죽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땐 엄마가 죽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 먹을 기회가 좀처럼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팥죽과 잣죽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난 그것을 잘 먹지 못했다. 팥죽도 그렇지만 잣죽은 목 넘김이 더더욱 어려웠다. 악동이었던 오빠는 잣죽을 맛있게 먹었다. 그러자 그렇게 잘 먹는 오빠 앞에서 못 먹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오빠가 잘 먹으니 나도 잘 먹는 척했다. 오빠를 좋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빠가 좋아하는 건 나도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다. 어쩌면 난 오빠를 이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묘한 경쟁심 같은 게 발동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빠가 하는 모든 걸 따라 하고 오빠가 좋아하는 건 나도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식구들 앞에서 잣죽을 못 먹는 티를 못 내었던 것이다.


그러다 몇 해 전 우연히 잣죽을 먹을 기회가 생겼다. 얼마만이었을까? 한 30년 만이었을까. 난 어렸을 때 일을 떠올리며 못 먹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의외로 고소하고 맛있었다. 잣죽이 원래 이런 맛이었나 좀 놀라울 정도였다. 솔직히 어렸을 땐 토하고 싶은 맛이었는데. 원래 어렸을 때 싫어했던 음식은 성인이 되어서도 잘 못 먹는 법인데 어리석다 싶을 정도였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어렸을 때 오빠를 좋아했고 때로는 이겨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살았는데 나이 들면서 오빠를 별로 이길 생각이 없어졌다. 그러자 잣죽의 맛을 알게 되었던 걸까? 그럼 좀 비약하는 것일까. 하지만 세상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고 어렸을 때 못 먹었던 잣죽을 왜 성인이 되어 먹기 시작했는가에 대해 정신분석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 분명한 건, 난 그렇게 잣죽의 맛을 새롭게 알았다는 것뿐 그것을 즐겨 먹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어렸을 때 못 먹었던 음식을 성인이 되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게. 그건 나의 잠자고 있던 미각의 지평이 넓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호박죽을 쑤기 시작했다. 그게 대략 아버지 돌아가실무렵부터였던 것 같은데, 살아생전에 한두 번은 드셨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 무렵 늙은 호박을 시장에서 팔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물론 그것이 나오기 시작했을 땐 관심도 없었다. 그저 동화의 삽화에서나 봤던 호박이 실물로 나왔네 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그 호박은 신데렐라가 탔던 마차가 되지 않았던가. 워낙 죽을 흔하게 먹었던 게 아니라(죽은 정말 아이들 이유식이나 노인이나 환자들이나 먹는 음식인 줄 알았다) 난 저걸 그렇게 빨리 죽으로 만들어 먹게 될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먹게 되겠지 했을 뿐이다. 그땐 죽집이 흔하지도 않았다. 설혹 있다고 해도 엄마는 뭐든 손수 만들어 먹는 것을 좋아해 사 먹는 건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먹을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엄마는 저걸 가지고 죽을 만들면 어떤 맛일까 궁금했나 보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엄마는 기어이 그걸 사다가 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노란색 호박죽은 검은 자줏빛 팥죽보다 보기에도 좋고 먹기도 좋았다. 사실 단팥죽이라면 모를까 이상하게도 그냥 팥죽은 입에 그리 당기는 맛은 아니다. 그나마 새알이라도 먹는 것이 아니라면 글쎄. 물론 그렇다고 팥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팥시루떡과 팥소를 넣은 찐빵은 우리 가족이 애정 하는 음식이다.  


그렇게 엄마의 호기심에 처음 먹은 호박죽은 달달한 것이 금세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동지 팥죽 대신 그때를 즈음해서 호박죽을 먹기 시작했다. 추운 날 후후 불어가며 먹는 맛이 없었다면 그 기나긴 겨울을 어떻게 보냈을까 싶다. 이걸 초기엔 두 번쯤 해 먹었다. 겨울 들어섰다고 한 번, 몹시 춥다고 또 한 번.


그렇게 겨울이면 해 먹는 호박죽을 어느 핸가 여름에 해 먹었다. 그땐 늙은 호박 가지고 안 하고 녹색의 단호박 가지고 했던 것 같다. 겨울이 아니면 안 해 먹는 그것을 왜, 무슨 정신으로 한 여름에 해 먹겠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큰 들통으로 하나를 했는데 그래도 아침저녁으론 선선한 바람이 불어 잘 식을 거라고 했던 걸 아침에 일어나자 쉬어 있었다. 어찌나 속이 쓰리고 아프던지. 전날 더운데 땀을 뻘뻘 흘리며 해서는 죽 쒀서 개 준다던데 개도 못 주고 홀랑 다 쏟아 버려야 했을 때 이제 다시는 한 여름에 죽은 쑤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곧 30년. 그러니 우리 집에 호박죽을 먹기 시작한 역사가 얼만지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이것 역시 아버지가 저세상에서 나 없이 먹으니까 좋으냐 하실 것 같다.


5년 전, 엄마는 갑자기 소화를 못하는 날이 여러 날 지속되더니 이윽고 기운을 못 쓰고 누워만 지내게 되었다. 물론 가끔 체해서 밥을 한 두 끼 못 먹는 날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엄마가 그러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엄마는 그런 와중에도 녹두죽을 먹고 싶다고 하더니 기어이 손수 녹두죽을 만드셨다. 그렇지 않아도 소화를 잘 못하는 속인데 웬만하면 어느 죽집에서 한 두 번 사 먹어도 되는 걸 굳이 쑤겠다고 하니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말려야 하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건 단순히 엄마표 녹두죽을 먹을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죽을 손수 쑬 정도라면 난 그것으로 엄마의 건강 상태를 감히 진단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 기운은 남아 있구나 하는. 하지만 밥 대신 죽이라니 이게 정상인가 싶기도 하고 도무지 판단도 분간도 가지 않았다.


그런 중에서 병원에 가지고 하면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한사코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날은 엄마도 당신이 만든 녹두죽을 잘 드셨다. 물론 평소의 반 정도 분량 밖엔 되지 않았지만. 그리고 식구들을 생각해선지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하면서 흡족해했다. 보는 나의 입장은 그다지 개운치 않은 건 당연했다. 처음 소화를 못하게 된 때로부터 지금까지 보면 더 나빠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좋아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빠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큰 일 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중엔 이 녹두죽뿐만 아니라 엄마가 그리 좋아하는 호박죽도 못 먹을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한 달이 조금 넘었을까, 그 사이 엄마는 기운을 전혀 쓰게 되었다. 급기야 더 이상 버티는 것에도 한계를 느낀 엄마는 119 구급대 요원의 등에 업혀 집을 빠져나가 병원으로 후송되기까지, 그리고 그 병원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고 나서야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했는지를 비로소 알았다. 그리고 왠지 그 봄날의 녹두죽이 생각났다. 그게 어쩌면 엄마가 천국 가기 전 마지막 음식이 될 뻔 한 건 아닌지. 가족들과 마지막 녹두죽을 나눠 먹고 저승길 가는 엄마 이야기를 나는 이승에 남아 슬픔이 복받쳐 오를 때마다 얘기하게 될 건 아닌지 불안했고 두려웠다.  


하지만 엄마는 정신력이 강했다. 평생을 가족들 먹는 것에 일생을 바친 엄마는 아직도 가족들을 먹게 해 줘야 할 사명이 더 남은 것인지 건강을 회복하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고 기도하신다. 한마디로 엄마는 음식이다. 별 이변이 없는 이상 올해도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면 엄마와 함께 호박죽을 만들어 후후 불며 먹게 될 것이고, 명절이면 빈대떡을 해 먹을 것이며, 봄바람이 솔솔 불기 시작하면 그 옛날을 떠올리며 녹두죽을 쒀 먹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먹을 수 있는 나날이 얼마나 될지 알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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