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혹시 집에서 무슨 소리 나지 않나요?
며칠 전 책 박스를 들어냈다. 젊은 날 발품 팔아 모은 책들이었다. 그땐 지금같이 인터넷으로 책을 사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꼭 발품을 팔아야 했다. IMF가 나고 살던 집을 전세로 돌리고 2년쯤 더 산 뒤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 4백 권쯤 되는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안 하고 라면 박스 몇 개 인지도 모를 박스에 담아 이사를 왔을 땐 그것을 풀게 될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가 거실에 붙박이용 수납장이 있으니 거기에 꽂아두면 된다고 했으니까.
엄마가 말한 붙박이용 수납장은 그리 큰 것도 아니어서 반도 못 들어 가게 생겼다. 설령 꽂는다고 해도 그럼 잡동사니 물건들은 어디에 둔단 말인가. 모르긴 해도 엄마는 내가 그 책 박스를 풀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또 푼다고 해도 언젠간 엄마는 읽지도 않을 책을 뭐하러 꽂아 두냐며 시마다 때마다 나를 괴롭게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결국 알아서 하란 뜻으로 알고 이사 오던 당일 방구석에 박스채 쌓아 두었고 20년 동안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동안 난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여전히 좋아하는 책을 사서 그 박스 위에 몇 겹으로 책탑을 쌓았다. 그것도 부족해 방 여기저기 빈 공간만 있으면 역시 책탑을 쌓았다.
물론 그동안 쌓아두기만 했던 건 아니다. 더러 안 보는 책은 사이판에 사는 친구에게도 보내기도 했고, 주민센터 도서관에도 기증하고, 또 중고샵에 팔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그 사이 엄마는 안 보는 책은 더러 버리라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난 그때마다 엄마에게도 취미생활이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취미생활이 있는 거라며 맞서기도 했고, 때로는 완곡하게 안 보는 책은 그런 식으로 해결한다며 엄마의 말문을 막곤 했다. 그래도 표가 나지 않으니 중요한 건 바로 이사할 때 데리고 온 책 박스를 해결하는 것이다.
엄마는 쌓아 논 책 박스 때문에 방바닥이 주저앉을 거라고 했다. 처음엔 책 박스를 해결하지 않으니 엄마가 수를 쓴다고 생각했다. 집이 얼마나 허술하게 지으면 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방바닥이 주저 않는단 말인가. 난 그야말로 머리털 나고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본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엄마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는 지인은 오카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에 보면 실제로 그런 일이 있긴 있더란다. 책을 하도 많이 모아 방구들이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순간 난 아찔하다 못해 현기증이 났다. 엄마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내가 짐짓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 지인은 아차 싶었는지 옛날 일본식 집들은 목조 건물이 많지 않냐며 지금은 철근으로 지으니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우리 집도 오래전에 지어진 집이고 보면 아무리 철근으로 지어졌다고는 그러지 말란 법도 없겠다 싶었다. 더구나 오래전부터 집에선 소리가 나고 있었다. 사람의 몸도 오래 쓰면 여기저기서 뚝뚝 소리가 나는 것처럼 집도 그런 것일 텐데 점점 뭔가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휘고 기우니까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엄마 말대로 저놈의 책 박스를 들어내 집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할 필요가 있을 것도 같았다. 더구나 단독주택이 아니고 공동주택이고 보면 안전에 서로서로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된다.
2. 첫인상을 얼마나 신뢰하는가.
그렇게 마음먹어도 책 박스를 드러내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마음만 먹었다뿐 실행하기는 족히 2, 3년은 걸렸던 것 같다. 책이 아까운 건 고사하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책이야 요즘 새롭게 나온 책이 더 좋지 옛날 헌책이 더 좋겠는가. 그럼에도 몸 쓰는 일엔 그다지 재지 못한 나는 엄마의 방구들 내려앉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현기증을 감수할망정 행동으로는 차마 옮기지 못하겠다. 그래도 올봄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 보리라 마음먹었는데 이번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올해 들어 몸 여기저기가 안 좋아졌고, 급기야 여름이 시작되면서 병원을 다니느라 책 박스를 치운다는 건 물 건너갔다. 하다못해 가끔씩 중고샵 나가는 것도 지난봄 이후 아예 전폐하다시피 했는데 무슨 수로 책 박스를 치운단 말인가. 그래도 열심히 병원을 다닌 덕분에 지금은 많이 낫다.
그렇게 몸이 나아지니 그동안 미뤄뒀던 책 박스 치우는 문제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언제 전화를 하면 좋을까? 이번 주냐, 다음 주냐 하다가 결국 더 이상 앞뒤 재지 않고 헌책방 한 곳의 연락처를 알아 내 불쑥 전화를 해 버렸다. 책방 아저씨는 내일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오겠다고 했다. 그 시간이라면 나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자꾸 몇 박스냐고 묻는 것이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온다고 해 놓고 안 오는 건 아닐까 좀 불안하긴 했지만 그냥 믿어보기로 했다.
아저씨가 오는 시간에 맞춘다면 난 10시 반 정도부터 책탑을 해체하는 작업에 들어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아저씨가 책 박스를 들어낼 테니. 중고샵에 팔거나 주민센터에 기증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오래된 책을 받아 줄리 없을 것 같고 그냥 헌책방에 헐값에라도 넘기는 것이 낫다. 나는 쌓아 논 책들 중에도 다시 안 볼 책을 추려 책 박스 나갈 때 딸려 보낼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시작을 했는데 순간 아찔했다. 내가 일을 너무 쉽게 본 것 같았다. 난 그저 아저씨가 책 박스를 가지고 나가기 편하게 길을 터주면 된다고 생각했고 쌓아 논 책이 얼마 안 되는 줄 알았다. 뭐든 일을 할 땐 쉽게 생각해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쉬운 일도 평생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웬걸 일단 손에 잡히는 대로 한 움큼의 책을 내려보았는데 순간 식은땀이 날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그때까지 쌓아놓은 책이 왜 그리도 크게 보이는지 나는 한 없이 작아져 이러다 책에 파묻혀 내일 아침 신문에 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책 정리하다 책에 깔려 죽었다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헌책방 아저씨가 들이닥쳤다.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오신다더니..."
시계는 이제 막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장은 끼워 맞추듯 웃음기 없는 얼굴로,
"11시잖아요."
어쩐지 빨리 서두르고 싶더니 오히려 한발 늦은 셈이 됐다. 책방 아저씨는 5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데 진중해 보이는 것이 말수도 없어 보였다. 모르긴 해도 아저씨도 책을 좋아하다 이 업종에 뛰어든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웬만치 말수가 있으면 이런저런 얘기를 시도해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상대가 말수가 있고 없고를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뭐 꼭 그래 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내 적지 않은 책 박스에 놀라며 언제부터 모은 책이냐고 물어 볼만도 한데 아저씨는 이런 일을 많이 해 봤다는 뜻인지 아니면 남의 일엔 일체 관심이 없다는 뜻인지 묻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난 그의 말수 없음이 싫지는 않았다. 쓸데없이 말 많은 것 보다야 낫지.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을 아저씨가 대신했고, 책 박스를 내가느라 몇 번씩 오르내릴 때 나는 나대로 얼른 안 볼 책을 추려 박스에 담았다. 무슨 책을 추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단지 마지막으로 담은 책이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것만 기억한다. 김훈의 책은 여간해서 쉽게 팔면 안 될 것만 같은데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문득 그 아저씨도 자신의 밥벌이가 지겨울 때가 있지 않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원래 취미로 했던 일이 밥벌이가 되면 지겨운 법이니까.
3. 나는, 유다일까?
책 박스를 얼추 다 나가고 정산할 순간이 왔다. 이럴 경우 책 주인이 돈을 받는 것으로 아는데 그동안 뭐가 바뀌어 오히려 수거료를 내야 하는 건 아닐까 잠시 불안했다. 하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솔직히 난 이 부분에 대해 전날 전화를 끊고 생각이 많았다. 돈을 받는다면 얼마를 받을까? 돈에 욕심내지 말자. 이렇게 실어 가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하고 얼마를 주건 주는 대로 받기로 하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킬로당 50원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계산하면 만원이라는 것이다. 전날 생각했던 것도 있고 하니 받기야 받는다만 역시 마음 한쪽이 씁쓸했다. 평생 모으고, 평생 간직한 책이 고작 만원이라니. 아깝다고 다시 원상 복귀할 수도 없고. 이럴 줄 알았으면 마지막에 과외로 담은 책은 그냥 둘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그 책들은 비교적 최근 것이라 중고샵에 팔던가 기증해도 되는 것들이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한 것이, 전날 밤까지만 해도 이 많은 책들이 내일이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뭔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책을 사 모으느라 들인 시간이며, 발품이며 책 한 권 한 권에 깃들어 있을 만든 사람의 영혼을 생각하면 이별식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그와 달리 정산할 때가 오자 돈을 생각하고 있으니, 마치 한때는 열렬하게 예수님을 존경했다 은 30냥에 판 유다와 내가 뭐가 다를까 싶기도 했다. 물론 그 책들이 예수님과 동급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한때는 나의 손떼를 탔고, 그 책을 구입해 뿌듯해한 적도 있을 텐데 이렇게 팔아먹고 얼마를 받을까를 생각하고 있다니. 차라리 돈을 아예 안 받는 것이 그 책들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을까.
내 손을 떠났으니 그 많은 책들은 분쇄기에서 종이조각이 되거나 운이 좋다면 아저씨의 책방 한 귀퉁이를 채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었으니. 이제 책에 욕심도 내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얼마를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난 지금도 죽을 때까지 다 읽지도 못할 책들이 지금도 쌓여있다.
4. 다시 읽지 않기 위해 읽는 책에 관하여
책 박스들이 집을 나갔으니 지금부터는 다시 책을 정리해야 한다. 그날 나는 몸이 다 나은 것이 아니라 한 번에 다하지 못하고 두 번인가 세 번을 쉬어가며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거의 하루 종일 했다. 엄마는 내가 책 박스를 없애버린 것이 속이 시원했던지 위로 반, 놀림 반으로 "네가 고생이 많다."를 연발했다. '봐라. 네가 그리도 좋아했던 것들이 너를 얼마나 힘들 게 하는지를.' 엄마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과연 책 때문에 정말 방구들이 주저앉았는지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도 파인 흔적은 없다. 역시 엄마는 허풍의 여왕 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역시 방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줄 필요는 있었다. 책 박스가 있을 때 한 번 높이 쌓인 책은 웬만해서 건드리지 않았다. 어쩌다 무슨 책이 생각나서 보려면 의자를 놓고 올라가야 한다. 그러다 실수로 잘못 건드려지면 와르르 무너지기도 한다. 이제 책 박스를 치웠으니 그런 일은 없다. 올려다봐야 하는 것이 이제 내려다 보인다.
정리를 하면서 평생 200권의 책만을 소유했었다던 수필가 피천득 선생을 생각했다. 그가 평생 2백 권의 책만 읽었을까. 그도 젊었을 때 한때는 책에 대한 욕심이 누구 못지않았을까. 더구나 그땐 책이 귀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전에 내었던 욕심들이 줄어들게 된다. 결국 그의 남은 생은 평생 함께할 책과 그렇지 않을 책을 속아내는 것으로 삼지 않았을까. 그의 지의 정원은 그렇게 가꾸어졌을 것이다.
사람의 목숨은 영원하지가 않다. 언제 죽을지 모를 목숨 이제부터는 무엇이든 적당히 모으고 적당히 버리며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말마따나 죽으면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닌데 어느 날 죽게 되면 남아 있는 사람에게 짐이 되지 않겠는가. 물론 유품 정리를 대신해주는 업체도 있다지만 있을 때 잘하랬다고 조금조금씩 정리해 주면 덜 부담스러울 것이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요즘 책은 얼마나 근사하고, 예쁘고, 실용적이며 합리적으로 잘 나오는가. 한마디로 탐스럽다. 정말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만 같다. 사실 그때 버린 책도 읽기보다 장서하다 버린 책이 태반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책을 읽는 건 지식의 축적만을 위한 것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독서를 위해서건 장서를 위해서건 우린 어쩌면 평생 읽지 않을 책을 위해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이건 또 얼마나 불가능한 목표일까. 인생이 신비로운 건 해 봤자 할 수 없고 해 낼 수 없는 일에 도전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책이 얼마나 많은데 평생 읽지 않기 위해 책을 읽는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밥을 먹는 건 반드시 굶지 않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위해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날 즉 죽음을 위해 먹는지도 모른다.(고 얘기하면 지나친 말장난이 되려나.)
분명 피천득 선생이 속아낸 책들 중엔 책으로서의 가치나 위용이 결코 떨어져서마는 아닐 것이다. 나 역시 그날 내 보낸 책들 중에 여전히 아직도 볼만한 책들이 다량 들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안 볼 책으로 분류가 되는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인연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한때는 군침 삼키도록 좋아해 놓고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 날 버리는 것이 어디 있냐고 책들이 아우성을 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인간의 마음은 갈대며 배신의 존재인 것을. 지금도 내 방엔 몇 권은 주민센터에 보내고, 몇 권은 다시 안 볼 책으로 중고샵에 내다 팔 책이 보인다. 그리고 아직 손도 못 댄 책들이 있고 새롭게 관심이 생겨 보고 싶은 아직 사지 않은 책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내가 무슨 수로 200권만 가질 수 있을까. 이것도 수양하는 마음이 돼야 가능한 걸까.
그렇지 않아도 저질체력에 책을 정리하느라 요 며칠 후유증에 시달렸다. 아무래도 주인에게 배반당한 책들이 저주를 퍼붓는가 보다. 미안하다. 그러나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자. 너희들은 한때나마 서점에 꽂히기도 하고 내 덕분에 나름 장수하지 않았니. 세상엔 빛도 보지 못하고 잊힌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좋다고 사 들인 책도 언젠간 너희들과 비슷해질 거야. 그러니 너무 섭섭해 말고 너희들은 너희들의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렴.
가을이 돼서 그런지 아니면 그렇게 책을 내 보내서 그런지 다소 울적한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또 요 며칠 지인들로부터 책 선물을 받았다. 난 책에서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할 운명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