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란 책을 조금씩 읽고 있다. 읽다가 등장인물인 우치다가 이런 말을 한다.
"먹고 자고 사는 곳이라고 한 것은 참 적절한 표현이야. 이들은 뗄 수 없는 한 단어로 생각해야 돼. 먹고 자는 것에 관심 없이 사는 곳만 만들겠다는 것은 그릇만 만들겠다는 얘기잖아? 그러니까 나는 부엌일을 안 하는 건축가 따위 신용하지 않아. 부엌일, 빨래, 청소를 하지 않는 건축가에게 적어도 내가 살 집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어."(106p)
우리나라의 건축가 특별히 집을 짓는 건축가들은 저 말에 얼마나 동의할지 모르겠다. 요즘의 건축가들은 동의할지 모르지만 예전엔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 같다. 예전엔 건축가들이 집을 짓는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건축가들을 집 장수 또는 미장이라고 낮춰 부르며 공간이 사람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공간에 맞추는 구조였다. 부엌만 해도 요즘에 과연 저런 부엌이 있나 싶기도 한데 실제로 없지는 않은가 보다. 몇 년 전부터 시즌제로 방영되고 있는 <삼시 세 끼>라는 프로를 보면 찬장이나 부뚜막이 부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마당 한 귀퉁이에 나와있는 걸 볼 수가 있다. 비나 바람을 겨우 가리는 정도로 얼기설기 만들어져 있는데 딱 70년대 분위기 그대로다.
어렸을 적 내가 기억하는 첫 집은 세를 줄 수 있게끔 지어졌다. 창문은 있으나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그래서 천정에도 창문을 냈지만 그것 역시 비나 한기를 막기 위해 슬레이트 지붕 쪼가리로 덥어 빛이 안 들어오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낮에도 겨우 형체나 알아보는 정도여서 불을 켜고 있어야 했다. 문간방 옆의 부엌은 말이 좋아 부엌이지 수도 시설도 없는 광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물론 불을 때는 아궁이는 있었다). 요즘 같으면 그런 집에 세 들어 살겠다고 올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은 우물이나 수도도 공동으로 쓰는 경우가 많아 그게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탁기도 있는 사람이나 쓸 수 있는 시절이었으니까. 찬장 놓을 자리는 있으나 낮은 부뚜막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고 물도 맘대로 쓸 수 없으니 물 쓸 일은 모두 마당에 나와 해결해야 했다. 그래도 꼭 부엌에서 물을 써야 하는 일이 있다. 그럴 경우 셋방 아줌마는 양동이의 물을 한 가득 퍼 가져가 국이나 찌개를 끓이고 냄비에 밥을 안쳤다. 나중에 아줌마는 그 일이 너무 번거로웠는지 엄마에게 큰 항아리를 빌려 부엌 한쪽에 세워두고 거기에 물을 아구까지 채우고도 한 양동이의 물을 더 가져다 놓았다. 모르긴 해도 그 아줌마는 항아리에 물이 채워지면 배가 불렀을 것이고 줄어드는 것을 보면 아까워했을 것이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아줌마의 모습이 애잔했다.
부엌도 부엌이지만 욕실과 화장실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지 싶다. 내가 자랐을 때만 해도 욕실이 생략된 집이 많았다. 친가나 외가댁은 물론이고, 내가 살던 집은 목욕탕이 있긴 했지만 안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별도로 지어져 있어 슬리퍼를 신고 가야 했고 그나마 추운 겨울엔 감기 걸릴 것을 걱정해서 부엌에서 씻은 적도 있다. 그렇게 부엌은 목욕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펄펄 끓는 물과 빨간 고무 대야 하나만 있으면 부엌에서의 목욕은 언제든 가능했다.
그 옛날 변소는 왜 그리도 멀고 무서웠던지. 변소를 왜 변소라고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어렸을 적 나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나와 비슷하게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의 집에 처음으로 놀러 가서 약간의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 아이의 집은 변소가 아닌 화장실에 양변기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 방광이 터져나가기 직전인데도 그 위에 앉아 일을 보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왜냐하면 안 써 봤기 때문이 아니라 써 봤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아버지를 따라 큰 고모댁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 집 역시 양변기를 사용했다. 멋모르고 위에 앉아 일을 보다가 곤혹을 치렀다. 그때의 트라우마가 작동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어린이 변기 시트가 있다지만 그땐 그게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그 친구와 그 친구의 언니의 허락을 받고 그 집 부엌 수채 구멍에 일을 해결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이사를 했는데 그때까지 기와집을 벗어나 소위 말하는 양옥으로 이사를 했다. 얼마나 좋던지. 하지만 난 그때도 양변기에 대한 트라우마를 벗어버리지 못했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양변기에 앉았다 일어났을 때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안도하기도 했지만 그동안 내 몸이 자라 있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실내 한 공간에 부엌과 변소와 목욕탕이 함께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야 비로소 부엌은 주방으로 변소는 화장실이란 이름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집의 구조에서 부엌과 변소는 가장 홀대받던 공간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집은 무엇을 중심으로 발전했을까. 모르긴 해도 마루와 안방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한옥도 그렇고 기와집도 그렇고 마루는 마당과 턱이 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높이가 크면 클수록 신분의 높음을 나타내지 않았을까. 가장 큰 방을 안방이라고 했던 것도 대가족이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문화였으니 그랬겠지만 거기에 가부장이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거기에 여자를 배려한 주방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양옥의 시대를 맞으면서 부엌과 변소가 실내에 들어왔다는 것은 여자와 어린아이 심지어 노인을 배려한 획기적인 주거 시스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집은 해가지면 전기도 아낄 겸 거실에 불을 켜놓는 것이 아니라 주방에 불을 켜놓았다. 그때 처음 쓰기 시작한 식탁은 밥만 먹는 곳이 아니라 언니나 오빠가 숙제나 시험공부를 했다.
그러다 거의 14, 5년 만에 집을 아예 허물고 새롭게 지었다(물론 그 사이 한 번 대대적인 수리를 한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때 살던 동네가 개축 붐이 일어났는데 그 바람을 타고 우리 집도 그렇게 한 것이다. 그때 우리 집은 언덕 꼭대기에 있었는데 집을 새로 짓고 그전까지 우리가 얼마나 한심한 집에서 살았는지 처음 알았다. 처음 이사 올 때 그렇게 좋아라 했던 집이었는데 전혀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왜관에만 신경을 썼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주거 시스템이 발전 단계에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선 마당을 대폭 줄인 게 좀 아쉽긴 했지만 대신 실내 공간은 그만큼 늘어났다. 안방과 거실은 넓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지만 주방을 넓힐 생각을 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예전의 화장실이 있던 자리에 배치를 했다. 그러면서 큰 창문을 두 개나 내었다. 그 창문을 통해 동네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날씨가 좋은 날은 멀리 여의도 63 빌딩까지도 다 보였다. 그런 것을 예전에 화장실 자리로 삼았다니. 알다시피 어느 집도 화장실 창문을 크게 내는 경우는 없다. 대신 예전에 주방이 있던 자리에 화장실 겸 욕실을 만들었다. 화장실 창문 치고는 좀 크게. 또 그렇게 생각하니 예전 집 주방 창문도 그리 크지 않았던 게 생각이 났다. 통풍을 위해서라도 주방문은 크게 내도 좋았을 텐데 왜 그렇게 조그마하게 지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 집은 소위 말하는 집 장수가 지었는데 그렇게 훌륭한 주방을 짓고도 그는 집을 잘 지었느냐 못 지었느냐는 화장실을 어디다 지었느냐로 알 수 있는데 이 집은 좋은 위치에 지어졌다고 만족해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화장실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에 그 집 장수의 말에 금방 수긍할 수 있지만 소설 속 우치다의 말과는 좀 차이가 있어 보이긴 하다.
집 설계에 아버지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집은 역시 살아 본 사람이 더 잘 아는 법이다. 더구나 이제 새로 지으면 또 언제 다시 짓게 될지 모르니 신중의 신중을 기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설계가 좋으면 뭐하겠는가. 여기저기 공사를 날림으로 해서 짓고도 하자 보수하는데 애를 먹었다. 그래도 주방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잘 지어서 한동안 우리 집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다. 모르긴 해도 아버지는 설계 일을 했어도 잘하셨을 것 같다.
요즘엔 우리나라도 주방에 꽤 공을 들이는 추세인 것 같다. 그래서 주방을 아예 제2의 거실이란 개념으로 보는 시각이 많아진 것 같은데 이게 과연 소설 속 우치다가 했던 말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TV를 보니 주방 한쪽 귀퉁이에 조그만 책상과 독서용 스탠드를 놓고 나름의 운치를 살렸는데 꽤 괜찮아 보이긴 했다. 하지만 묘하겠도 나는 그 옛날 셋방 아줌마가 부엌에 갔다 놓았던 물항아리와 오버랩이 되고 말았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는데, 뀡 대신 닭이라고 현실적으론 그게 불가능하니 주방에 그런 조그만 공간이라도 만든다는 건데, 그런 공간이라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것이 낫겠지만 그래도 왠지 애잔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여자가 있어야 할 곳이 여전히 주방 한쪽 귀퉁이라니. 원래 여자는 그렇게 애잔한 존재였던가.
다시 한번 우치다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자. "... 그러니까 나는 부엌일을 안 하는 건축가 따위 신용하지 않아. 부엌일, 빨래, 청소를 하지 않는 건축가에게 적어도 내가 살 집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어." 뭔가 철학이 느껴지는 말이다. 나 역시 그 사람이 아무리 능력자고 잘난 사람이라도 일상을 잘 살지 않는 사람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제시간에 자고, 제시간에 밥을 먹고, 빨래며 청소를 미루지 않고 일정 정도의 청결을 유지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신뢰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건축가에 빗대면 저런 말이 나오지 않을까. 또 집을 짓는 일은 당연히 그 안에 들어가 사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 그 공간을 이해하지 않고 서야 어떻게 집을 짓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치다의 말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의미심장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