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이 나왔던 <전쟁과 평화>를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어떻게 이 요정 같고 엘레강스한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이제 처음 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사춘기 시절에 보았을 것이다. 그때는 이 영화에 어떤 문제점이나 토를 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그저 오드리 헵번에만 꽂혀서 보았다. 다시 보니 참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한다.
그동안 이 영화는 시대별로 여러 버전으로 나온 모양이다. 최근에 내가 본 건 영국 BBC에서 제작한 6부작이었는데 나름 탄탄하게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도 본지가 몇 년 됐다.) 원작이 워낙 대작이니 영화화한다고 해도 역시 대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러닝타임이 3시간이 넘는다. 영국 BBC버전이야 TV시리즈니 더 말할 필요도 없고. 그래도 TV 시리즈는 끊어주는 거라도 있지 이 영화를 풀타임으로 본다는 건 쉽지 않다. 모르긴 해도 극장 개봉 당시에도 중간에 인터미션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처럼 나도 몇 번 끊어서 봤다. 누구는 영화는 앉은자리에서 다 보는 거라고, 그게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의 기본자세라고 엄중히 말하곤 하는데 아무리 영화를 좋아해도 이 영화는 좀 예외 선상에 둬야 하지 않을까? 아님 말고.
사실 다시 보니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그만도 1956년작이다. 책도 그렇지만, 온갖 영상미와 빠른 전개 톡톡 튀는 대사를 장착한 요즘의 영화를 볼 때 이런 고전 영화를 선택해서 본다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보기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물론 고전 영화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미덕을 안다면 그것을 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지만 말이다. 그런 갈등 속에서도 이 영화를 끝까지 본 건 역시 나타샤 역을 맡은 오드리 헵번 때문이다. 영화에서 어쩌면 그리도 빛이 나던지. 그것은 또 그녀가 입고 나왔던 옷들 때문이기도 하다. 우아하거니와 지금 봐도 절대 꿀리지 않는 그녀만의 패션 시그니처가 있다. 또 그것만 보자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절정을 이루지 않았을까. 특히 첫 장면에서 입고 나왔던 일명 오드리 헵번 드레스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고 지금도 타의 주종을 불허한다.
이 드레스는 최근 방영을 시작한 <호텔 델루나>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이지은이 잠깐 입고 나오던데, 이지은이 나름 스타일이 좋은 배우긴 하지만 그 특유의 귀여움 때문일까? 오드리 헵번의 엘레강스한 매력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고전 영화를 보는 것 중에 하나는, 당대 유명한 여배우들이 스크린에서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는가도 주목해서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놓고 보자면 아무리 탁월한 작품성을 인정받는 영화도 순식간에 베스트에서 워스트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건 감독이 대부분 남자이고 보면 남성 중심적 사고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영화는 1950년대 영화다. 물론 오드리 헵번을 부각하려고 노력한 흔적은 다분히 보이지만, 당구의 쓰리 쿠션도 아니고 결코 짧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그녀는 세 남자를 오간다.
내가 알기론 헨리 폰다가 맡은 피에르와는 오누이 사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엔딩에선 전쟁의 폐허 속에 서로를 발견하고 둘이 찐한 키스를 하면서 마무리를 하던데 순간 내가 잘못 봤나 했다. 그런데 오누이가 맞을 것이다. 적어도 사촌 이상의.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썼던 시절엔 사촌끼리도 부부의 연을 맺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문제는 둘이 사랑을 나눌만한 개연성이 영화에선 별로 없었는데 끝을 그렇게 마무리했다는 거다. 더구나 나타샤는 처음엔 번듯하고 순수해 보이는 어느 장교를 사교장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가 했더니 어느새 바람둥이가 정열적으로 유혹하자 그 남자에게 가려고 한다. 하지만 여러 반대와 방해에 못 이겨 포기를 하더니, 먼젓번 장교가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몸져눕게 되자 그의 곁을 지키다 결국 죽자 그렇게 친척 오빠에게로 간 것이다.
원작에 충실했건 새로운 해석을 했건 나타샤의 캐릭터는 곧 감독의 해석과 설정일 것인데 영화에서 보이는 대로 보자면 나타샤는 이 남자에게 갔다 저 남자에게 갔다 지조 없는 여자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자세해 보면 나타샤는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그렸다는 것이다. 즉 여자는 남자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나타샤를 통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대엔 이런 설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에 나왔던 비비안 리 주연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라. 난 왠지 이 두 영화가 뭔가 모르게 겹치지만 명백히 다른 게 있다는 걸 볼 수 있는데, 알다시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와 헤어져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라면서 시종 자주적인 여성상을 보여주지 않는가. 하지만 본 영화에선 나타샤가 꽤나 씩씩하고 적극적인 인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남자든 여자든 이렇게 잘 흔들리는 사람을 과연 좋아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물을 설정했다는 건 작가도 감독도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거니와 그 시절 이 정도로 활용해도 상당히 발전된 형태를 보여줬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이런 대작에 오드리 헵번을 등장시킬 생각을 했던 것도 그렇고. 하지만 후대의 사람이 볼 것을 생각했다면 좀 더 인물 연구를 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인물의 일관성만이라도 잘 수립했다면 좋았을 걸 이 영화에선 그 점이 아쉽다. 그래서 한 간에 떠도는 좋은 시나리오를 연출이 말아먹을 수는 있어도, 나쁜 시나리오를 연출에서 심폐 소생되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다.
그래도 전혀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다. 옛날 배우나 고전 영화를 좋아한다면 봐 줄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