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싸서 말려."
안성기, 박중훈이 주연을 맡은 <칠수와 만수>(1988년도 작)을 내가 그전에 보긴 보았나 보다.
"조금씩 싸서 말려."란 대사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몰랐다. 이 영화에 나온다. 하지만 몇 장면은 파편처럼 기억이 나지만 전체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로써 나의 기억력도 이젠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는 게 증명된 셈이다. 기억력 하나만은 자부했는데...
이 영화를 두고 당시 영화계는 코리안 뉴웨이브의 신호탄이라고 했단다. 분명 저 문제적 대사와 더불어 몇몇 장면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이상은 본 것 같은데, 이 영화를 두고 코리안 뉴웨이브의 신호탄이란 건 특별히 의식하고 봤던 건 아닌 것 같다. 그런 것을 보면 난 영화 사조 같은 건 아는 바가 없고 그저 줄거리에 집착해서 볼 뿐이다. 그건 지금도 별 다를 바 없고. 영화 보는데 꼭 사조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만도 30년 전 영화다. 그때는 뉴웨이브라고 어쩌고 떠들만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보면 어느 루저의 자조, 외침, 투정인지 투쟁인지 모를 뭐 그런 것으로 보일뿐이다. 하지만 80년 대의 사회상과 주류가 되지 못하고 어두운 가정사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두 사나이의 한 맺힌 절규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그랬다면 일종의 산파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 오히려 두 주인공을 옥외 광고탑에 올라가게 만들어 놓고 하나의 페이소스로 만들었다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미덕이라면 미덕 되시겠다.
이것저것 아무리 노력해 봐도 되는 것이 하나도 되는 것이 없는 칠수와 만수는 오다가다 만난 사이임에도 비슷한 운명을 가진 샴쌍둥이 인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욕망은 그런 것이다. 칠수는 아버지가 예전에 지은 죄 때문에 해외 파견 근로자 요건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신다. 연좌제인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 대한 불만이 얼마나 크겠는가. 자신이 지은 죄도 아닌데 아버지의 죄로 인해 자신의 뜻을 펼치며 살 수 없다니. 만수는 어두운 가정사가 있지만 미국에 사는 누나의 초청장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오지 않고 있다. 성공해서 근사하게 살고 싶고, 우연히 만난 지나와도 신분을 속여가며 연애를 하고 싶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처해진 입장과 현실은 달라도 욕망과 좌절을 반복하는 인간상은 세상에 널리고 깔렸다. 어쩌면 내가 그런 줄도 모르고.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칠수와 만수가 옥외 광고탑에 올라가 세상을 향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토해내는 장면일 것이다. 땅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과 위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것은 기분부터가 다를 것이다. 그야말로 세상이 내 발아래 있는 것만 같고, 언젠간 마음속에만 꾹꾹 눌러놓았던 울분을 터뜨려야겠다고 별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설혹 있다고 해도 지상의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이 자살극을 벌이는 줄 알고 내려오라고 확성기에 소리를 지를 뿐이다. 이건 또 어찌 보면 연극적이면서도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누가 알아주겠는가 칠수와 만수의 억울하고 눌린 마음을. 사정과 시대는 달라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통의 불일치와 각자의 어깨에 짐 지워진 삶의 무게는 세월이 흘러도 변할 줄 모른다. 보고 나면 딱히 재밌다거나 유쾌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즐거움만을 위해서 보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영화엔 안성기와 박중훈이 말고도 지금은 중견 연기자가 된 배종옥의 당시 풋풋했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때 당시 극 중 여자 등장인물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다. 80년대 말이라면 여성의 권위가 많이 신장된 때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너무 허술하다. 극 중의 지나(배종옥 분)는 칠 수에게 있어 중요한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선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지 못했다. 짐작했겠지만, 이때는 경제 발전으로 인해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집안이라면 여자도 어렵지 않게 대학을 갈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그건 좋은 혼처를 찾는데 도움이 될 뿐 자아실현을 하는데 쓰이진 못하고 있다. 그리고 혼처 역시 부모가 정해주는 것에 대해 별 불만이 없고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하다못해 칠수가 지나에게 기습적으로 키스를 하는데, 지나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던가 아니면 강하게 거부하지도 못한 채 오히려 달아나 버린다. 그렇게 거부할 거라면 달아날 때 달아나더라도 칠수의 뺨이라도 한 대 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당시엔 그렇게 표현돼도 상관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아마도 가위질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80년대도 여성의 권위는 그다지 향상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연구와 공부는 이때부터 서서히 시작됐을 때였으니.
그래도 영화 속 지나가 너무 올드하다. 이것은 어쩌면 감독이든 시나리오 작가든 지나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읽히는데, 요즘 극 중의 여배우들의 활약상을 볼 때 그 차이는 더더욱 현격하다. 지나를 그렇게 소극적으로 다룸으로 이야기가 더 풍부하게 될 수 있었을 텐데 밋밋하게 했다. 그래 놓고 코리안 뉴웨이브의 신호탄이라고 호들갑이었다는 게 지금에 와선 어떤 의민지 모르겠다. 옛 영화를 본다는 건 그런 것이다. 때로 뒷북이 될 수도 있는 것. 개봉 당시엔 오, 그래 그래 하다가도 다시 보면 영 아니올시다라고 말하고 싶어 지는 것. 영화는 시대마다, 보는 사람의 기분이나 시각마다 달리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신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