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목은 많이 들어봤다. 유명한 조선작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했다. 1975년도 작이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려 보지 못하고 이제야 봤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이 작품이 꽤나 야한 작품인 줄 알았다. 일명 포르노. 그런데 지금 보니 그다지 야한 영화도 아니다. 야하다면 때밀이를 하는 남자 주인공 창수(송재호 분)가 영자(염복순 분)를 자신이 일하는 목욕탕으로 불러 등을 밀어주는 장면 정도랄까? 그것도 앞에 가릴 건 타올로 다 가리고. 등급도 15세 관람가다. 하긴, 예전엔 포르노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엔 등급이 세분화되지도 않았거니와 흥행을 생각해 의도적으로 야한 영화로 몰아갔는지도 모른다.
포스터가 좀 조악한 것도 사실이지만 예전엔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의 포스터를 사람이 일일이 그리기도 했으니 당시로 저 정도의 그렸다면 잘 그린 축에 속한다. 또한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뭔가 묘한 느낌도 들면서 여자를 상품화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아니면 사회 분위기에 따라 영화 포스터를 보는 시야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내용은 야하다기 보단 오히려 사회 비판적 요소가 강해 보인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산업화와 더불어 페미니즘 또는 사회 불평등이란 관점에서 얘깃거리가 많아 보인다.
70년 대는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던 때이기도 하지만 그건 산업화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이 산업화가 과연 좋기만 했던 것인가에 대한 단적인 예를 보여주기도 한다. 많은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왔고, 그에 따라 도시화는 한층 속도를 내기도 했다. 또한 거기에 편승에 시골 처녀들도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기도 했다. 그런 여자들이 가는 곳은 공단 아니면 버스 안내양이나 부잣집 가정부고, 번 돈은 쓰지 않고 시골집에 부쳤다. 그 역을 맡는 건 대부분 시골집 맏딸이 대부분일 것이고, 그들은 동생들이나 오빠의 학비를 대며 가정을 경제적으로 도와야 했다. 그리고 거기서 못 견디거나 개 같이 벌어 정승 같이 벌겠다면 술집으로 빠진다.
어찌 보면 우리의 영자는 바로 이런 정 코스를 밟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잣집에 가정부로 도시살이를 시작했으나 주인집 망나니 아들에게 정조를 빼앗기고, 결혼을 꿈꿔으나 해줄 리 없어 그 집을 나와 버스 안내양으로 취직하지만 사고로 불구의 몸이 된다. 결국 자신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형질의 인긴이라는 걸 알고 그때부터 몸을 팔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막살 때마다 가정부 시절 우연히 알게 된 창수가 구원남으로 나타나곤 한다. 도시라고 해서 망나니 짐승만 사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알뜰히 돌봐주며 영자와의 결혼도 꿈꾸는 순정남이 있다. 그러나 그 역시 고아에 힘없는 주변인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그 시절 있을 법한 두 남녀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낸다. 사회 고발적 의미도 있다. 왜 여자는 돈을 벌면 불행해져야 하는가. 요즘 같으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지만 당시엔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여자는 그저 남편의 그늘에서 자식 낳고 가정 건사를 잘하는 것이 미덕인 양 했던 때가 있다. 하지만 산업화의 물결이 여자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여자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걸까.
이 영화엔 다분히 남성주의 시각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영자의 가정부 시절 주인집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요즘 같으면 성폭행을 성폭행이라고 말하겠지만 그 시절은 무조건 가해자 보단 피해자 더 피해를 본다. 문득 대척점에 있는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 생각났다. 톨스토이는 오히려 남자가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회개도 하더만, 문제작이라고는 하나 그런 양심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역시 톨스토이다 싶다.
엔딩도 그렇다. 창수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자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뭐 거기까진 그럴 수도 있다. 영자는 자기 자신을 너무도 잘 안다. 창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엔 자신은 너무나 흠도 상처도 많다. 자살의 충동을 이기고 자신을 아는 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도 좋다. 그런데 동병상련이라고 신체부위는 다르지만 같은 불구자와 결혼을 해 행복하게 잘 사는 것으로 마무리한다는 건 다소 억지스럽다. 과연 영화 어느 부분에 영자가 전성시대를 누렸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돈을 좇아 서울 상경을 했다는 죄로 지지리 불행한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을 창수란 구원남이 있어 전성시대라는 걸까? 아니면 천신만고 끝에 비록 불구라고는 하지만 착한 남자 만나 아이 낳고 잘 살게 된 게 전성시대라는 걸까.
정말 영자가 전성시대가 되려면 남자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고, 성폭력을 치료할 수 있며, 응당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법적인 제도가 이루어져야 하며 무엇보다 영자가 자기 다운 삶을 살아야 전성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70년 대 영자들은 전성시대를 맞지 못했으며, 지금은 그나마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미흡한 상태다. 작품이 갖는 의의가 있긴 하지만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2천 년 대 영자의 전성시대는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
옛날 영화를 본다는 건 묘한 매력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들의 리즈 시절을 보는 재미도 있고, 지나간 시대를 엿보고 옛 추억에 잠길 수도 있다. 주인공 역을 맡은 염복순 배우를 기억할 사람이 있을까. 이름이 그래서일까? 나름 요염한 데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도 어릴 때 본 배우라 나는 이 배우가 한창 활동했던 끝자락에서 기억할 뿐이다. 유명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름의 존재감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조금 더 인기를 얻어도 좋았을 텐데 70년대 일명 여배우 트로이카라던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에 가려 스크린에서 일찌감치 잊힌 배우가 되었다. 아마도 70년대 말 정도까지 활동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것 같다. 누구는 가수 이효리를 닮았다고 하는데 얼핏 비운의 배우 이은주 느낌도 난다. 물론 여성스럽기는 이은주이지만 선 굵은 연기는 염복순이 앞선다. 내친김에 소설도 읽어보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