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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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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수집가 Aug 14. 2019

인연에 관하여

#우리 집 개들

이 이야기는 애완견이나 반려견이란 말이 생기기 이전의 일이다.

그 개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냥 있어왔다. 수컷이었고 갈색 점박이에 털도 길고 제법 의젓했다. 이름은 캐츠였다. 왜 캐츠인지는 역시 나도 잘 모르겠지만 당시는 개에게 외국식 이름을 붙여주는 게 유행이어서 뜻 같은 건 무시하고 그렇게 붙여줬던 것 같다. 언젠가 녀석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아마도 6,7살 무렵이지 싶다) 그다지 젊어 보이진 않았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만난 개여서일까? 난 그 개에게 별 애정이 없었던 것 같다. 그 개는 항상 자기 집 앞에 묶여있을 뿐이었다.


개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어느 날 조그만 강아지를 데리고 들어오셨다. 암컷이었고 이름은 뽀삐였다. 그 개도 점박이 이긴 하지만 캐츠만큼 털이 길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게 영물이었다. 데리고 온 첫날부터 주인의 마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때 날씨가 꽤 추워 아직 어려 당분간 안에서 키우기로 했는데 똥오줌 자리를 알았다. 아무 데나 싸는 것이 아니고 꼭 마루 문을 긁어 마당에 나가서 싸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뽀삐에게 정이 든 사이 캐츠가 집을 나가버렸다. 그 무렵 아버지는 무슨 생각에선지 캐츠의 목줄을 풀어 가끔씩 밖으로 내 보내곤 했다. 나는 저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염려스럽기도 했는데 다행히도 몇 번은 알아서 집을 찾아 들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산책에 맛을 들인 녀석이 사람만 보면 줄을 풀어달라고 난리를 치는 것이다. 그날은 왠지 풀어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집을 안 나갔으면 했는데 누가 풀어줬는지 아니면 제풀에 풀어졌는지 집을 나가버렸다. 난 잡으러 큰길까지 녀석을 쫓아갔지만 워낙에 발이 빨라 쫓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난 집으로 돌아왔고 그날 하루 종일 녀석을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영원히. 그때 안 사실인데 수캐는 바람이 나면 어느 날 집을 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역시 풀어주지 말아야 했다.


또 말에 의하면 개는 죽을 때가 되면 집을 나가버린다 말도 있었다. 그렇다면 녀석은 나이도 많았으니 죽을 때가 돼서 나갔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제 뽀삐가 들어왔으니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고 자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우리 가족들은 개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아무도 걱정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그냥 없어졌으면 없어졌나 보다 했다. 그래서 나도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프로레슬링

레슬링이 인기를 끈 건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날 TV를 보는데 이게 자꾸 눈에 들어오는데 묘하게 사람을 흥분시켰다. 김일과 천규덕은 우리나라 프로레슬링의 양대 산맥이었고, 여건부를 비롯한 몇몇 레슬러가 그 뒤를 이었다. 특히 김일 선수가 나오면 그 흥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삼판 양승제. 즉 세 번을 싸워 두 번을 이겨야 하는데 그 이기기까지의 고난과 역경의 순간을 보고 흥분하고 환호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상대 선수가 일본 사람이면 그 흥분은 배가가 된다. 난 그때 우리나라가 왜 일본을 미워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하나 아는 건 있었다. 이들이 우리나라 선수와 싸우면 꼭 반칙을 한다. 특히 뭘 코치에게 넘겨받아 허리춤에 숨기고 심판이 못 보는 사이 적당한 기회를 봐 그 물건을 가지고 우리 선수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러면 경기장의 관중이고 TV를 보는 시청자고 야유를 보내며 못된 놈이라고 욕을 해 대는 것이다. 

김일과 이노키의 경기 장면. 오른쪽이 김일 선수

경기의 양상은 비슷해서 한 번은 우리 선수가 이기고, 또 한 번은 상대 선수가 이긴다. 그리고 세 번째에 가서는 또 우리가 이기는데 이게 너무 극적이다. 그때 사람들은 너무 흥분하고 몰입해 그 속에 숨어 있는 게임의 법칙을 알지 못했다. 나중에 이런 게임의 법칙을 알았을 때 프로레슬링에 대한 인기는 곤두박질쳤다. 이제 관중들은 더 이상 그런 게임의 법칙에 놀아나지 않았다. 나 역시도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정말 더 이상 놀아나지 않을 만큼 대중들은 영악해진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식상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 늘 새로운 것을 좋아하지. 그러므로 프로레슬링의 몰락은 시작부터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것이 한때 인기를 구가했던 건 영웅에 대한 목마름 때문은 아니었을까?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사라졌지만 지금도 박치왕 김일 선수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다. 그는 확실히 그 시절 영웅이었다. 


그런데 일본 선수가 원정을 와 그런 반칙을 쓴다면 반대로 우리나라도 일본 원정을 가면 그러지 않을까? 그런 짐작은 쉽게 해 볼 수 있다. 그러지 않아도 레슬링은 쇼란 말이 그 인기 절정일 때도 공공연히 나돌고 있는 말이기도 했다. 진실만을 추구하는 게 반드시 최선은 아니었나 보다.   


#광희동 선생님

우리 가족들은 과외 공부 선생님을 꼭 ‘광희동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단단하고 자그마한 체구에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나는 학교 선생님은 어려워했지만 그 선생님만큼은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만큼 선생님은 친근하게 우리 4남매를 대해 주셨다. 


선생님은 어떻게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얼핏 듣기론 선생님은 원래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부군이 병이 들어 간호하느라 교직을 그만두셨다고 한다. 그러다 호구지책으로 과외를 시작했지만 아이들을  모으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엄마는 엄마대로 우리 4남매에게 과외 공부를 시킬 생각을 하고 있던 차 선생님을 알게 되어 인연을 맺었다고. 후에도 엄마는 길거리의 잘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에게 “너희들 과외 안 할래?”해서 대신 아이들을 끌어 모아주기도 했다고 들었다. 


사실 그건 좀 놀라운 일이었다. 엄마에게 사람을 끌어 모으는 재주가 있었다니. 그게 또 소문이 나서 선생님 댁은 아이들로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정말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과외를 받으러 선생님 댁을 다닌 적이 있는데 정말 초등학생 아이들로 바글바글 했다.

 

아무튼 선생님은 그때 은혜를 입었다고 엄마와 자매처럼 친하게 지냈다. 덕분에 우리는 나름 공부를 잘했다. 나중에 우리 집이 이사를 했는데 이사하고도 선생님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연락도 하시고 놀러 오시기도 했다. 또 그 이사한 곳에서 25년을 살다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이사 하룬가 이틀을 앞두고 연락을 하셨다. 그러면서 이사하거든 꼭 연락하라는 걸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적은 수첩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이내 잊히고 말았다.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신지, 건강은 하신지 궁금하다. 


당시 난 선생님을 뵈면 코가 서양 사람처럼 오뚝해서 속으로 많이 부러워했다. 지금도 선생님의 서글서글한 인상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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