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첫 번째 이야기
드디어 아이슬란드 여행을 통틀어 가장 길고 지루한 여정의 서막이 올랐다. 이 여정을 시작하게 된 데에는 넘나 길고도 복잡한(?) 사연이 숨어 있었으니. 여행을 시작하기 전, 한 달 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근 한 달간 잠도, 밥도 거르고 촬영과 편집에만 매진했던 이작가와 정피디. 과로는 급성 스트레스로 이어지고 분노가 극에 달했지만 여전히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화풀이를 하듯 일단 아이슬란드행 비행기 표는 끊었건만. 시간이 없어 검색조차 할 수 없는 빡빡한 방송제작 일정 탓에 여행 일정은 아무것도 짤 수 없었다. 지긋지긋한 방송국 놈들(=본인).. 우리 두 사람은 출국을 고작 열흘 남겨놓은 시점에야 비로소 일정 정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대중적인 여행지도 아니고 언어도 낯선 아이슬란드. 처음에는 어디를 가야 할지, 어떤 곳이 유명한 지조차 알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를 부르짖던 우리 두 사람은 우선 블로그와 여행책을 보며 닥치는 대로 아이슬란드 정보를 끌어 모았다. 그리고 꽃 같은 청춘들이 찍어온 영상을 교과서처럼 보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티끌처럼 모인 정보들은 조금씩 형태가 만들어지더니 우리의 일정들 안에 차곡차곡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거의 모든 일정이 잡혀가던 그때.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풍경사진 한 장이었다.
그려진 것 같은 하늘과 바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작은 집들. 동화 속에서 등장하는, 우리가 꿈꾸던 풍경이었다. 그래 바로 이곳이야! 외치고 열심히 검색을 한 결과, 사진 속 배경은 바로 후사비크였다. 게다가 후사비크에서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고래를 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었다.
딱! 우리 두 사람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여기를 가보기로 하고 다시 루트를 짜는데..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지. 후사비크가 이렇게 멀 줄은.
수도 레이캬비크에서는 470km, 요쿨살롱과는 무려 650km나 떨어져 있었다. 만약 요쿨살롱에서 출발한다면 반나절을 꼬박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길지 않은 여행 일정을 감안한다면 절대 갈 수 없는 완전 비효율적인 코스였다. 반나절의 시간을 버리고 후사비크를 들를 것인가. 이번 여행에서는 과감히 생략하고 다음을 기약할 것인가.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정피디도 걱정되고 다양한 장소를 가보고 싶은 이작가는 반대를 하고, 사진 속 풍경에 매료된 정피디는 무조건 가고 싶었다. 두 사람의 의견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간 이야기를 나눈 끝에, 결국 후사비크행을 결정했다. 대신 여행 코스를 조금 수정하고 전날 출발지인 헬라에서 일찍 출발하기로 뜻을 모았다. 후사비크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대망의 후사비크로 향하는 길. 며칠간의 적응기간 덕분인지 정피디의 운전 실력도 한층 안정적이고 날씨도 비만 살짝 내리는 것이 걱정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출발지인 헬라에서 후사비크까지는 대략 6시간 정도. 헬라에서 레이캬비크를 지나 시계방향으로 1번 국도를 쭉 타고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서둘러 차에 짐을 실었다. 하룻밤만 묵는 일정이라 간단히 에어비앤비로 집도 예약했다.
그동안 나름 익숙해진 고속도로를 달리며 아이슬란드에서의 다섯 번째 여정을 상쾌하게 시작했다. 헬라에서 레이캬비크까지 가는 길은 이미 와봤던 곳. 주변도 둘러보는 여유까지 생겼다. 그렇게 레이캬비크를 지나는 우리 앞에 갑자기 해저터널이 나타났다. 너무 편안하게 생각했던 탓일까. 터널을 지나며 다시 멘탈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레이캬비크에서 후사비크로 가는 길목에는 약 4km 정도의 해저터널(hvalfjörður Tunnel, 흐발피요르드 터널)이 자리하고 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보기 드문 유료 도로로, 통행료를 지불해야 한다. 통행료는 1000 ISK. 다행히도 현금과 카드 결제 모두 가능하다. 덕분에 현금은 1도 챙기지 않았던 이작가와 정피디 역시 수월하게 카드로 결제를 완료했다. 역시 아이슬란드는 길거리 핫도그부터 통행료까지 카드 한 장으로 무엇이든 가능하다. 여행자들에게는 최적의 도시임에 틀림없다.
터널은 3차선, 요금 정산소 부근은 2차선으로 되어있는데 한쪽은 터널 이용요금을 지불하는 차선이지만 한쪽은 터널을 지나가지 않는(=요금을 지불하지 않는) 차선이다. 잘못해서 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차선을 잘 살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요금 정산소 부근은 늘 혼잡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마음의 준비만 단디 한다면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정피디는 아이슬란드에서의 가장 아찔한 순간을 꼽는다면 해저터널을 지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 말한다. 비바람이 미친 듯이 휘몰아쳤던 첫째 날도, 기상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던 요쿨살롱으로 향하던 날도 아닌 그저 해저터널을 지나는 순간이라니! 그때의 느낌을 정피디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해저터널로 들어선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너무 어두운데?’였다. 가끔 지나던 한국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른 어두컴컴함이었다. 게다가 터널을 밝히는 전등 역시 한국과는 달랐다. 오히려 운전하는 내내 시야를 방해하고 더 어지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터널은 계속 길어지는 것 같고, 설상가상 반대 차선과의 간격은 훨씬 좁아 속도도 쉽게 내지 못했다. 정말이지 문자 그대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행히도 한계의 정점에 다다른 순간, 저 멀리 빛이 보이고 기적적으로 터널이 끝났다. 다시 훤한 도로를 주행하려는데 이건 웬걸, 터널을 지나기 전보다 바람이 더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터널을 빠져나온 반동의 느낌 때문인지, 북쪽으로 더 올라왔기 때문인지. 첫날 느꼈던 ‘차를 들썩이는 바람’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핸들도 제멋대로 돌아가고, 속도 역시 평소보다 더 낼 수 없었다. 천천히 돌아 오후면 도착할 수 있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은 ‘오늘 안에 후사비크에 도착할 수 있을까?’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직 오늘 여정의 반도 채 오지 못했다.
정피디 SAYs,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정피디의 SAYs에서는 ‘운전’을 빼고 말할 수 없다. 이번에도 운전에 관해 꼭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바로 ‘새’다.
사실 새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어느 나라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동물칭쿠 중 하나다. 하지만 유독 아이슬란드에서는 낮게 나는 새들을 볼 수 있다. 때문에 도로를 주행하면서도 같은 눈높이에서 나는 새를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새 칭쿠들과의 만남이 유쾌하지 않은 딱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바로 ‘바람’. 사실 아이슬란드의 바람을 맞다 보면 절로 이해가 간다. 차가 흔들릴 정도로 거센 바람인데 새들 역시 버텨낼쏘냐.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바람을 맞고 휘청 거리는 새들이 정말 많다. 게다가 저 멀리 날다가도 갑자기 차도 쪽으로 휙 날아드는 바람에 심장을 부여잡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정말 여차하면 새들을 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후사비크를 가는 길목 곳곳마다 생각보다 많은 새의 사체들이 있어서, 끔찍하기도 또 안타깝기도 했다. 피해갈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피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터. 그저 내가 더 조심히 운전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