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두 번째 이야기
매몰찬 바람과 함께하는 길은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후사비크로 향할수록 고도 역시 점점 높아지더니, 어느새 앞이 보이지 않는 구름 속을 헤치며 가고 있었다. 분명히 출발하기 전에는 쉬엄쉬엄 가자고 했건만. 두 사람 모두 은근히 불안했던 모양이었나 보다. 반복해서 틀어놓은 워너원의 노래(TMI - 우리 두 사람 모두 프듀의 노예였다. 지금까지 계속.)는 30번쯤 흘러나오고 엉덩이는 점점 감각을 잃어갔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에 잠깐 정차했던 것을 제외하고 한 번도 쉬지 않은 채 후사비크까지 쭉 달렸다.
후사비크로 가는 길은 청명함의 연속이었다. 높은 산을 넘어 빨간 하트 신호등이 귀여웠던 아쿠레이리를 지나니 서서히 후사비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사진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누군가 ‘동화를 쓰려고 하는데 예쁜 마을을 추천해 주세요.’라고 물어본다면 1초도 지체하지 않고 이곳을 말해주리라. 파란 하늘과 흰 요트가 지독히도 잘 어울리는 마을이었다.
아이슬란드 여행 자체가 특별한 일탈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후사비크를 들르는 오늘내일의 일정은 진짜 ‘선물 같은’ 일정이었다. 때문에 숙소 역시 그동안 묵었던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보다는 색다른 곳을 가고 싶었다. 하여 에어비앤비를 이용해 현지인 할아버지의 집을 예약했다. 호스트 팔미 Palmi 할아버지는 정부 기관에서 20년 넘게 근무하셨던 분으로, 퇴직 후 부인과 소소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분이셨다. 에어비앤비 사이트에서 ‘후사비크’를 검색했을 때 단번에 검색된 집이 바로 이 집이었다. 그림 같은 집에서 그림처럼 살고 계신 두 분의 사진을 보고 우리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팔미 할아버지의 집을 선택했다. 후사비크로 출발하기 전, 오늘 도착한다는 짤막한 문자를 남기고 가고 있는 도중 무언지 모를 답장을 받았다.
‘나는 오늘 누군가를 만나러 다른 지역에 간다. 저녁에 돌아올 예정이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들어가 있어라.’
라는 내용의 문자였다. 아니, 비밀번호도 알려주지 않으시고 열쇠도 없는데 어떻게 먼저 들어가라는 거지? 약간의 불안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아무리 영어가 잘 통하는 아이슬란드라지만 상대는 60은 훨씬 넘기신 것 같은 어르신이다.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차를 대놓고 무작정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며 팔미 할아버지의 집에 도착해 주차를 했는데.
으아니 이렇게 귀여운 할아버지라니! 정말 문자대로 먼저 들어가 있을 수 있었다. 우리가 묵을 게스트 룸에 열쇠가 쏙 꽂혀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 앞에는 우리를 격하게 환영하는 할아버지의 웰컴 인사가 쓰여 있었다. 이런저런 걱정은 금세 날아가고, 우리 두 사람은 너무도 귀여운 팔미 할아버지의 묘안(?)에 호들갑을 떨며 한동안 주저앉아 깔깔댔다.
열심히 사진도 찍고 짐도 꺼낸 후, 귀여운 캐릭터가 달린 열쇠를 살짝 돌려 하루를 묵을 우리의 ‘집’에 들어갔다. 파란 대문 너머 들어가자 작지만 아늑한 거실과 침대가 우리를 맞이했다. 보일러도 미리 틀어놓으셨는지 훈훈한 기운도 함께였다. 침대에 짐을 올려두고, 화장실부터 부엌까지 곳곳을 구경했다. 정말이지 하루를 보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집이었다. 오늘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물을 끓여 따뜻한 차를 나눠 마시고, 후사비크 동네 탐방을 나섰다. 후사비크에 도착하자마자 거짓말처럼 잔잔하게 내리던 비는 그치고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팔미 할아버지의 마음처럼 따뜻한 햇빛이었다. 빛을 받아 파란 바다는 엄청난 보석을 품을 듯 반짝였다. 동네를 돌며 사진도 찍고, 여기저기 이웃집을 기웃거렸다. 작고 예쁜 정원을 만들어놓은 집부터 아이들이 뛰노는 트램펄린을 세운 집도 있었다. 우리처럼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멋쩍게 던진 인사에 환하게 웃으며 답인사를 해주었다. 시간만 더 있다면 일주일을 머물러도 좋을 곳이었다. 마트에 들러 간단히 간식거리를 사고 항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좋고 그 무엇도 행복한, 충만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작가 SAYs, 그 한 때, 한 순간
만약 누군가가 내게 ‘당신을 표현하는 단어 하나를 말해보세요.’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즉흥’이라 말할 것이다. 욕심이 많은지라 모든 것을 직접 보고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게 제일 크고, 원체 취향 역시 금방금방 바뀌기 때문.
이런 즉흥적인 성향이 가장 크게 나타날 때는 역시 여행을 하는 순간이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보통의 사람들은 여행지를 결정한 다음 그곳의 정보와 이미지를 찾기 시작한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면 가는 방법을 찾아보거나 그곳에서 듣고 싶은 노래를 선곡하는 과정을 거치곤 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그 반대로 흘러간다. 처음 여행지를 결정하는 것까지는 같지만 여행 계획은 딱 거기까지. 대강의 장소, 혹은 지역만 정해둔 채 무작정 여행을 떠나는 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만의 장소’를 찾기 시작한다.
한 장소가 마음에 들면 하루 종일 그곳에 머물러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마음이 동할 때면 하루 종일 걷기도 한다. 힘든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숙소에서 노래를 듣거나 책을 읽는다. 이 모든 하루를 결정하는 건 그날 아침의 컨디션과 느낌이다. 일어나 눈을 뜨고 아침을 먹으며 오늘의 일정을 ‘즉흥적으로’ 결정한다. 그리고 여행을 마치면 머물렀던 장소를 다시 찾아보며 그때의 느낌을 복기하곤 한다. 때문에 나의 여행은 대개 ‘어디를 다녀왔다’기 보다는 ‘어떤 기분으로 무슨 노래를 들으며 뭘 봤다’로 정리될 때가 많다. 장소 이름이나 정보보다는 당시의 이미지와 그때 흘러나오던 노래로 기억하는 것.
나에게 후사비크는 ‘빛’으로 기억된다. 정피디와 함께 벤치에 앉아 인어의 비늘처럼 반짝이는 파도를 보며 감탄했고 비 갠 하늘을 연신 카메라에 담으며 충만한 햇살을 만끽했다. 서늘한 바람과 따듯한 빛이 공존하던 그 시간. 벤치에 앉아 여행을 떠나는 항구의 배를 보며 시답지도 않은 농담을 주고받던 순간. 그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쉼 없이 달려왔는지. 이상하게도 아이슬란드에 대한 추억은 힘들게 달려왔던 출발 전의 시간들까지 포함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아주 오랜 시간 남아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