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세 번째 이야기
헬라에서 후사비크까지. 먼 길을 도는 강행군임에도 불구하고 후사비크를 고집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림 같은 후사비크의 풍경사진 한 장, 그리고 바로 고래! 후사비크는 아이슬란드에서 최초이자 최대로 고래 투어를 운영하는 지역이다. 남쪽에서는 빙하를, 그리고 북쪽에서는 고래를 볼 수 있는 곳이라니. 아이슬란드는 그런 곳이다.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을 경험할 수 있는 곳.
하지만 오늘의 일정을 너무 과신했던 것일까. 우리가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늦게 후사비크를 도착했다. 게다가 계획했던 고래 투어 역시 이미 출발을 한 상황. 다음 투어를 신청하기엔 너무 시간이 늦다. 내일로 다시 레이캬비크로 돌아가 귀국 준비를 해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고래 투어는 과감하게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래, 이렇게 내려놓는 것도 있어야 이 아쉬움으로 다음에 또 올 수 있지 않겠는가. 머리로는 이해를 하려 하지만 괜히 자꾸 욕심이 난다. 분명 나중에 후회로 남을 오늘의 선택. 더 아쉬움이 남기 전에 맛있는 음식으로 보상하자. 서둘러 후사비크의 맛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항구도시인 후사비크에서는 꼭 해산물 요리를 먹어보라는 사람들의 글을 발견했다. 다행히 근처에 맛도 좋고 가격도 적당한 레스토랑을 발견했다.
Gamli Baukur라는 이름을 가진 레스토랑은 얼핏 보면 아주 투박한 가정식을 팔 것 같은 외관을 지니고 있다. 바닷가를 마주하고 있는 울퉁불퉁한 오두막. 허기진 몸과 마음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내부 역시 대부분 통나무로 인테리어 되어 있다. 배의 방향을 조정하는 키와 바다 그림이 그려진 장식물이 없었다면 외딴 시골 산장에 들어와 있다고 느껴질 만큼 레스토랑은 작고 소박했다. 메뉴판에는 다양한 메뉴가 올라와 있었지만 우리는 단번에 ‘오늘의 생선’과 샐러드 등을 주문했다. 부산이 회라면 후사비크에서는 오늘의 생선이 답. 오늘은 과연 어떤 놈이 잡혀 우리의 식탁에 올라올 것인가. 두근두근 요리를 기다렸다.
드디어 우리 식탁에 올라온 피시 오브 투데이! 오늘의 생선은 ‘cod’, 대구라고 한다. 마치 스테이크처럼 소담히 올라온 생선을 조심조심 잘랐다.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부드럽게 해체되는 대구 살을 놓칠세라 냉큼 입에 담았다. 크림처럼 살살 녹는 생선은 곁들여 나온 소스와도 아주 잘 어울렸다. 거기에 포실포실한 감자까지! 과연 사람들의 추천을 받을 만하다. 한 입씩 맛본 후 짧은 감탄을 나눈 우리는 그 뒤로 한마디 말도 없이 음식들을 모조리 입에 넣기 시작했다. (실은 ‘해치웠다’가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털어 넣었다’가 맞을지도...)
창 너머로 반짝이는 햇살을 머금은 바다가 보이고, 고개를 조금 돌려 레스토랑으로 향하면 훈훈함이 흘러넘치는 웨이터 오빠가 웃으면서 일을 하고 있고, 입 안에 느껴지는 음식은 5점 만점에 6점, 환상적이다. 고래투어를 놓친 아쉬움은 이미 무의식의 세계로 넘어간 지 오래. 우리는 이렇게 단순한 사람들이다. 배도 차고 안팎 경치(?)도 최고인, 조금의 나위도 없는 촘촘하게 행복한 시간을 오래오래 붙잡아두고 싶었다.
요리부터 후식까지 야물 차게 챙겨 먹고 나니 바깥 풍경이 이제야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배도 채웠겠다, 휴식도 취하고 구경도 할 겸 레스토랑을 나와 항구를 따라 슬슬 걸었다. 항구 ‘도시’라기보다는 ‘동네’에 가까운 따뜻한 공간. 생활하는 사람들과 여행하는 사람들 모두 표정에 조급함이 없다. 동네를 맴도는 바닷새들도 느긋하게 날갯짓을 하며 항구를 선회한다. 먼 바다에서 고래를 보고 돌아온 사람들의 표정에는 행복이 가득하다. 그 마음들이 물들어서였을까. 우리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동네만 걸었을 뿐인데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포근해진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며칠이고 머물고 싶은 마을이다.
시계는 밤 9시를 훌쩍 넘겼지만, 백야 덕분에 아직 환하다. 체력도 아직 남아있는 상태. 동네를 조금 더 걸어볼까 고민하는데 오늘 숙소의 주인이신 팔미 할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는 연락이 왔다. 인사를 드리기 위해 발걸음을 옮겨 숙소로 향했다. 어떻게 생기셨을까.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만큼 따듯하고 귀여우시겠지. 아이슬란드어로 ‘감사하다’는 말은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숙소가 있는 언덕길을 올랐다. 팔미 할아버지는 마당에서 우리가 오는 걸 기다리고 계셨다. 이런 배려 넘치는 훈훈한 할아버지 같으니! 역시 우리가 상상했던 대로 팔미 할아버지는 인상 좋고 포근하셨다. 할아버지 역시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아온 손녀들을 반기는 것처럼 우리를 맞아주셨다.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할아버지는 우리의 숙소를 함께 돌며 사용법과 주의해야 할 것들을 꼼꼼하게 알려주셨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한다는 할아버지는 천천히 우리에게 만나서 반갑다며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하루밖에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는 말과 함께.
정피디 SAYs, 주어진 시간
아무런 걱정거리 없이 푹 잠을 잤기 때문일까. 이른 시간이었지만 알람을 맞춰놓지 않았는데도 번쩍 눈이 떠졌다. 일을 시작한 이래 이렇게 단번에 일어난 적은 드문 것 같다. 기분 좋은 개운함으로 살짝 집 밖을 나왔다. 한국에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저 멀리 바다에는 무지개가 떠 있었다. 들뜬 마음에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안부 인사를 전하고 무지개를 자랑했다. 한국에서의 소소한 소식과 일상을 듣고, 아이슬란드의 일상을 나누고, 돌아가서 보자고 전화를 마무리한 후 갑자기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그대로 통화를 하던 도로가에 주저앉았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방금 전화로 나눈 소식들을 일상으로 마주해야겠지. 또다시 시작되는 일상은 어떤 색을 띠고 있을지, 나는 그걸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모든 것을 내려놓기 위해 떠나온 여행이었는데. 결국 내가 고민하는 모든 문제는 평생 안고 가야 할 질문이자 인생에서 풀어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스스로 이미 조금은 짐을 내려놓았다는 걸 깨달았다. 대체 나는 후사비크에서, 그리고 아이슬란드에서 얼마나 많은 걸 얻어가는 건지. 이곳에서 주어진 시간은 아이슬란드 여행 중 가장 평화롭지만,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구나. 다시금 알게 되었다.
이작가 SAYs, 동네 한 바퀴
어렸을 때부터 나는 유독 ‘골목길’을 좋아했다. 차가 쌩쌩 다니고 사람들 많은, 큰 유리창만 있는 시내 중심을 빠져나오면 사람들이 사는 동네 골목길이 나온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주 잘 아는 듯이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의 일상을 나눈다. 지나가는 집에서는 아이들이 까르르하며 웃는 소리가 기분 좋게 새어 나온다. 시내의 의미 없는 소음과는 다른 느낌의 북적함.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오는 분주함이다.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여행지를 갈 때도 관광지에서 약간 벗어난 골목길을 꼭 걸어본다. 그리고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재미있게도 각 도시의 골목길마다 그 동네만의 고유한 느낌과 질감을 가지고 있다. 어딘가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그들이 사는 건물의 구조, 색감,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과 새어 나오는 음식 냄새.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공간을 구성하고 그 도시의 인상을 만든다.
후사비크를 돌아보며 느낀 동네의 인상은 ‘쉼’이었다. 항구에는 여러 대의 요트가 차례로 정박해 있었다. 우리가 주말에 차를 몰고 근교로 놀러 가듯, 이들은 요트를 타고 먼 바다에 나가 고기도 잡고 휴식을 취한다고 한다. 요트 역시 럭셔리하기보다는 오붓한 느낌의 작고 아담한 사이즈가 대부분. 일하는 사람들의 행동에도 느긋함이 배어있다. 최선은 다하지만 안 돼도 어쩔 수 없다는, 아무래도 좋을 듯한 표정. 여행객들조차 분위기에 동조된 듯,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1박 2일의 짧은 머무름이었지만 후사비크를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긴 시간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간도 잠시 쉬어갔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