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하나

by stellab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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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내 평생 열 손가락도 아닌,

다섯 손가락에도 겨우 꼽을 만큼 제대로 불러본 기억이 없어서

아빠. 라는 단어는 항상 어색하기만 하네요.

아빠가 등져버린 세상에서 저는 여전히, ___ 살아가고 있습니다.

습관처럼 썼던 잘. 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얼른 지우고 공백을 채워 넣습니다.


슬픔이란 무엇일까요.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던 순간에도

그리고 아빠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내내

마치 타인의 장례식장에서 타인의 죽음을 마주한 사람처럼,

제 삶에서 가장 명확했던 이 단어의 감정이 제대로 느껴지질 않아

그저 먹먹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아주 작고 작은 점 하나.

아빠의 장례식장을 들어섰던 순간부터

제 마음속을 내내 가득 채우고 있었던 건, 그 점 하나뿐이었습니다.

단단하게 응축된 검은 돌덩어리 같았던 작고 작은 그 점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던 걸까요.

저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이 알아보지 못할 만큼 쌓이고 뭉쳐버린 그 어떤 것인지

아니면 심장보다 컸던 그 무엇이 닳고 닳아 그저 작은 점이 되어버린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빠가 끝내 완성시키지 못한 인생의 마침표가 제게 주어진 것인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8년이 지났지만 아빠에 대한 그리움은 왜 생기지 않는 걸까..

당연하고 분명한 이유. 사실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내 안에 가득한 그 차가운 진실이 드러날까 봐,

그리고 그 진실이 드러났을 때

아무것도 모를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떠들어 대는 것이 싫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마음을 여미고 또 여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빠가 이 땅을 밟고 계셨을 때도

남들이 말하는 딸에 대한 아빠의 사랑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하는 제겐

이렇게 비어버린 제 마음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우린, 서로를 알 수 있는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아니, 우리 가족 모두는 서로를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와 남남이 되어 버리셨던 그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반겨주었던 건 짐이 빠져버린 텅 빈 방 안뿐이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어렵고 어렵게 무거운 마음과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아빠를 찾았을 때

제 곁에 남아있었던 건 아빠의 온기가 아닌

이방인을 위한 한 사람의 빈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또 반갑지 않게 비집고 들어오는 아빠의 그 마음을

제 마음에 꼬깃꼬깃 겨우 담아 집에 돌아왔을 때,

하나 더 늘어버린 건 마음의 멍뿐이었어요.


아빠가 저의 슬픔을 알지 못했듯이

저 또한 아빠가 사셨고, 살아내셨던 그 세월들이

어떤 모양의 슬픔과 고통이었는지 감히 가늠하지 못합니다.

그저 제가 보고 듣고 겪었던 충분한 불행들 속에서 아주 간신히 아빠를 이해할 뿐이겠지요.

답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엮인 이 기이한 운명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제가 겨우 내린 결론은 우리 모두는 다시는 가족으로 만나서는 안된다는 것뿐이지만..

초등학교 때 집에 들어가기 싫어 무거운 가방을 메고

등이 흥건하도록 동네를 돌고 또 돌았던 그 기억의 무게만큼

마음을 짓누르는 천륜이라는 불행한 인연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다음 생에서는 부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철없는 어린 여동생들이 북적이는

어느 집 가장이나 장남이 아닌,

가난한 한 가정의 아버지도 아닌,

책임감에서 자유롭고 돈 걱정 없는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행복하게 살아가실 수 있는 삶을 사시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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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기일인 오늘.

유일하게 제게 남은 기억은 장례식 마지막날 먹었던 포도의 달달함 뿐이에요.

지쳤던 마음과 몸을 회복시켜 주었던 그 포도의 향긋하고 달달했던 맛으로

아버지의 마지막을 그렇게 기억하겠습니다.

선친께서 제게 주셨을지 모를 그 미완성의 마침표를

제 인생의 마지막 문장을 위해,

공백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하며 잘. 사용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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