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묘진의 악어노트

서사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문장에 끌렸는지가 묻고 싶을 뿐

by 스텔라


구묘진의 '악어노트'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꼼꼼히 문장을 놓치지 않고 정성스럽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방금 넘긴 페이지를 되돌아 읽다 보면 또다시 새롭게 읽히곤 한다. 마치 읽어본 적 없는 문장처럼. 진부한 표현, 뻔한 문체로 예측 가능하게 쓰인 문장이 단 한 줄도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은 소유욕을 자극한다.


굳이 무슨 이야기냐고 묻는다면 누군가의 대학시절을 비규칙적으로 기록한 일기라고 대답해야 한다.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나'는 작가일 수밖에 없다. 특이한 점은 제목처럼 나의 시점이 아닌 '악어'의 시점에서 완전히 다른,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싶을 정도로 판타지적인 이야기가 군데군데 끼여있는 덕에 더더욱 혼란스럽게 읽힌다. 그러나 다 읽고 나면 어렴풋이 그 두 시점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야기의 서사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부재는 물론이거니와 큰 줄기를 이루는 줄거리도 없다. 이 소설은 삶 그리고 사랑에 관한 보고서에 가깝다. 악어노트를 읽으면서 영화 '문라이트'와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떠올렸다. 내면과 감정에 대한 치열하고 날카로운 묘사, 특정한 시점의 밀도 높은 재현, 종국에는 어느 한 사람으로 인한 한 시점을 지독하게 파고들어 한 개인의 인생의 단면을 그저 목적도 판단도 없이 완전히 보여주고 만다. 아무런 강요도 설득도 없음에도 여운이 며칠은 남아있게 되는 묘한 소설이다-끝까지 읽자마자 다시 앞장을 읽어보게 되는- 논리적인 설명을 할 수 없이, 이후에는 그저 이 책을 좋아한다는 말 이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걸 발견한다.

이 소설이 좀 더 절절한 지점은 사회적 억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접해 본) 어떠한 퀴어물보다도 자신의 성적지향성을 저주로 받아들이는 고통의 생생한 묘사에 있다. 여자를 사랑하게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가혹하게 여기고 그 인식이 사는 내내 그를 따라다니며 삶을 파멸시키고야 만다. 그 사실을 앞 장부터 알아버리는 게 마음 아프고, 그 고통이 가상의 인물이 아닌 한 시대를 살았던 감수성이 예민했고 성찰에 능했던 누군가의 삶이라는 게 더욱 마음 아프다.


처음 100page를 감탄하면서도 억지로 읽었다. 단지 이 소설은 혼란, 존재에 대한 외로움, 청춘의 불안, 동요, 절망 정도로 다가왔다. 그때 끝까지 책을 읽지 못한 것은 이 책은 아름다우나 나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누가 봐도 매력적이고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동경하는 누군가의 삶을 관찰하는 것과 같았다.


무의욕적인 나날이 지나칠 정도로 자주 일상을 채우고 혼란스럽고 복잡한 감정이 한 차례 지나가고 다시 펼쳐 본 이 책에서 그토록 이질적이던 소설의 거리가 갑작스레 좁혀졌다. 특정 문장을 읽으며 마음이 아릴 정도로 내 일기를 읽을 때보다도 더욱 저린 공감을 했다. 이전 내 청춘에는 늘 '외로움'이 있었다고 쓴 적 있다. 작가와 같은 고통과 아픔을 겪은 적 없어도 외로움에 깊이 빠져들어 견디기 괴로워 차라리 자신을 미워하기로 선택했던 사람들, 누군가를 자기 자신보다 사랑했지만 어긋나야 했던 관계를 목격하고 이따금씩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소설은 소중하고 내밀한 일기장이 되어줄 것이다.


대체할 수 없이 몇 번을 읽어도 새롭게 읽히는 소설, 모두가 읽을 필요도 없고 모두가 공감할 수 없을지라도 분명 '악어노트'는 문학의 한 자리를 영원히 차지하고 특정 누군가를 매료시킬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

너무 좋은 문장이 많아 선택하기 어려웠다.


나는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다. 눈물이 샘물처럼 줄줄 흘러 계란이나 꿀을 온통 얼굴에 바른 듯하다. 시간은 눈물 속에 잠겨 있다. 온 세상이 모두 나를 사랑한다 해도 소용없다. 나는 나 자신을 증오한다.-36p

세상은 일찌감치 자기로 인해 비롯된 재앙의 책임으로부터 교활하게 빠져나갔다. 오직 당신 자신만이 어떤 무언가에 못 박혀 죽어있는 것을 스스로 알 뿐이다. 당신은 영원히 모종의 감각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누구도, 어떤 방법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곳에는 오직 당신 혼자뿐이다.-37p


정말 두려워요. 어쩌면 너무 작아서 현미경으로나 보아야 보이는 생활 속 세균을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카펫 아래에 쌓아 뒀다가, 시간이 오래지나니까 그 양에 놀란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대학 생활은 평소 누가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없고 스스로 알아서 할 뿐이라 만약에 카펫 아래 처리해야 할 무엇이 쌓여 있다면, 이렇게 느슨해진 상태에서는 진공청소기의 뭉쳐 있는 덩어리를 털어낼 때 일순간 가장 '쓰러지기' 쉬운 것 같아요. 일말의 방어력도 없거든요. 통째로 진공청소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일 때 간절히 끌어내 줄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었죠. -148p


오직 수령만이 나의 진실에 속한다는 느낌이었다. 그 일 년여 정주로의 옥상 방에 살면서 매번 어두운 밤이 찾아올 때마다 홀로 석관 속에 누워 잠들면서, 수령 외에 누구도 이 세상에서 나와 상관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너무 뼈저리게 느꼈다. 내면의 진실과 외부의 현실이 거의 완전히 평생선을 그으며 한 자락 무늬조차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다. (중략) 하지만 죽음의 흰 포말이 문틈으로 스며들어 바닥 가득 차오를 때, 나는 놀랍게도 오직 그만이 내 마음속에서 자라난 존재임을 뒤늦게 발견했다. -179~180p


이후 마치 지구인이 달에 착륙하는 여정처럼 끝없는 무중력 상태의 허공을 떠다니고 있다. 하나 둘 얼굴들이 떠오른다. 얼굴마다 일말의 감정, 사랑, 씁쓸함 또는 비애가 저장되어 있으나 내게 가장 중요했던 것들은 한 차례 또 한 차례 '분리'되고 말았다. 피할 수 없는 운명적 분리처럼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았고, 시공간의 변동은 마술을 부리듯 내게 중요한 것들을 변질시켜 사라지게 했다. 마지막에는 내가 점유해 지키고 있는 기억의 보루마저 저 시공의 심술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83p


두 사람이 내게 베푼 신임의 기초가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서 나오고 싶은 충동과 사람들에게 속을 보이면서 만나고 싶은 갈망이 시작된 것이다. 과거라면 이런 심경은 곧바로 끊어 버렸을 일이다. 나는 또 한 번 인류를 믿어 보기로 했다. 성적 욕망과는 거리가 먼, 평등하게 진정한 이해와 포용을 전제로 한, 완전한 신뢰의 관계를 건립해 보기로 한 것이다.-227p


때때로, 어떤 슬픔이나 고통은 그 깊이를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어떤 사랑은 그 깊이로 인해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게 한다. 그것은 몸 안에서 발생한 뒤, 그곳을 완전히 초토화시킨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은 화석이 되어, 뇌리에 깊이를 정해 보존하도록 설계되었다가, 머릿속에서 일정 시간 동안 왱왱거리고 나면 나중에는 화석 계곡의 풍경화마저 텅 비게 되는 것이다.
' 사람의 가장 큰 슬픔은 과거에 가장 갈구했던 욕망을 상실하는 것이다.' -241p


사람과 사람은 이렇게 한마디로 마주친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이 사람이 나와 같은 주파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또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소범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280p


당신에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열 수 없었고, 심지어 당신과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힘들어요. 입을 열기만 하면 당신에게 크게 소리치고 싶었고, 같이 있으면서 당신에 대한 원한이 산과 바다가 뒤집힐 정도로 커졌어요.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거든. 이렇게 악한 것들을 원치 않아. 사랑은 선하고 아름다워야 하잖아요. 나는 이제 그런 사랑의 미덕을 돌이킬 수 없으니까, 사랑하지 않는 길 밖에 없어요. -3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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