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함 앞에서 우리는 고립된다.
*영화 버드박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감기 기운이 느껴졌다. 설마, 아닐 거야. 애써 부정하면서도 남편에게 사태를 알렸다. 하필 이런 시기에 평소에 잘 걸리지도 않는 감기가 왜? 약간 추웠나. 날이 따뜻해졌다고는 하지만 어젯밤 반팔 차림으로 잠이 든 게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외출은 거의 없었고 외출 시에도 마스크를 쓰고 후딱 볼 일만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닐 거야. 기침도 나지 않고. 호흡도 멀쩡한 걸. 감기약을 챙겨 먹고 목을 따뜻하게 보호한다. 많이 아프지는 않다. 괜히 불안할 뿐이다. 건강 염려증은커녕 건강에 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사람도 이런 시기에는 '만약'이란 걱정을 완전히 떨쳐내기 어렵다.
한동안 뉴스를 멀리하다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에 꽤나 뉴스피드를 들락날락거린다. 잠잠해 가던 것처럼 보이던 코로나 바이러스는 많은 사람의 우려대로 다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특히나 어젯밤 대구 지역의 확진자 수가 크게 늘었다. 감염자가 신천지 종교모임에 참석했으며, 1000명 이상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과 접촉했다고 말한다.
매일 확진자 수와 감염 경로, 새로운 우려사항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뉴스를 보면서 넷플릭스 영화 '버드 박스'를 떠올렸다. 평범한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이 세계에 퍼져나간다. 눈을 뜨고 감염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리고 결국 자살하게 되어버리는 끔찍한 병. 병은 동시다발적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세상은 아비규환이 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왜 이런 병이 생겼고 이 병의 정체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건 영화 속 중요하지 않은 부분일 수도 하지만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운 좋게 감염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뾰족한 대책 없이 버틸 수밖에 없다. 일상은 파괴되어 버리고 경제, 언론, 국가의 의미는 사라진다. 작은 공간 우연히 만난 개인들의 고립된 세상만이 남게 된다. 생존과 죽음 사이 그들을 지켜주는 방호망은 유리창이다.
영화 속 대부분의 갈등은 새로운 이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평소처럼 도덕적 기제가 작용하는 상황이라면 누구나 생명의 존엄성을 믿고 타인을 기꺼이 도와주고자 한다. 문 밖에서 살려달라고 절망적으로 소리를 치며 애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 사람은 나와 같은 비감염자일 수도 있으며 문을 열지 않으면 죄 없는 그가 감염되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속이는 침입자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의견이 서로 갈리고 난투극이 이어지고 반대론자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격리하기도 한다.
나쁜 결과보다도 불확실한 상황 자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는 연구가 있다.* 불확실한 환경에 놓이면 사람은 가장 먼저 '타자'를 분리해버린다. 나를 공격하고 내게 피해를 주는 '타자'를 내 삶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막아야만 한다. 전쟁에서는 우리 편과 적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하다. 국가, 인종, 소속, 사는 지역을 기준으로 편이 갈린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전염병 혹은 바이러스라면 양상은 훨씬 복잡하다. 누구나 타자일 수 있으며 명확한 증거와 기준이 없다. 불확실하다면 누군가를 우선 타자로 분리해 버리는 편이 마음도 편하고 합리적이다. '죄수의 딜레마', 우리 편(비감염자) 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있더라도 개인의 안전을 담보로 모험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버드박스에서는 두 가지 감염 확인 방법이 있다. 감염자가 가까이 오면 새가 지저귄다. 새가 울지 않는다면 그 공간은 안전하다. 다른 하나는 감염자의 눈을 보는 것이다. 감염자의 눈은 비감염자와 무언가 다르다. 또한, 감염 방법을 막는 확실한 방법이 존재한다. 감염자와 바이러스를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즉 눈을 가린 채 산다면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바이러스는 버드박스보다 감염자 확인이 불분명하며 확실히 피하는 방법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기침, 호흡곤란, 발열 등 증상은 흔히 걸리는 감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감염 방법 또한 아직 불분명하다.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고 외출을 자제하는 개인의 노력 외에는 크게 할 수 있는 게 없다. 즉,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감염자, 불특정 다수와 접촉할지 모른다는 공포는 필연적이다.
원래도 좋지 않았던 경제 상황이 더욱 침체되는 것도 문제지만, 불안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타자와의 분리가 심화되는 게 더욱 우려스럽다. 이러한 불안이 없을 때에도 기술과 자본주의의 발전은 언제나 개인을 고립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일상의 단절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연결되던 모임은 취소되고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편히 외식할 수조차 없다. 내가 모르는 타인이 존재하는 공간 아니 타인과 교차하는 모든 지점은 기피 장소가 된다. 나와 타인의 안전을 위한 자발적이고 합리적인 단절과 고립, 그럼에도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버드박스 세계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맬러리(산드라 블록)'를 보며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어려움 끝에 미래 세대를 상징하는 두 아이와 무사히(간신히 기적적으로) 새가 지저귀는 새로운 공동체에 도착하며 일말의 희망을 남기며 영화는 끝이 났다.
'확진'과 '양성'이라는 바이러스의 공포 속 사람들은 어디로 향해야 좋을지 모를 불안과 원망을 '타자' 그리고 타자로 의심되는 '잠재적 타자'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쏟아내기 쉽다. 타자와의 구분과 거리두기 나아가 비난은 안전이란 명분 아래 정당화된다. 자신의 일상이 침해되는 실질적이고 불확실한 위험이 도사리는 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고립되지 않을 수 있을까? 영화 속 위험을 감지하는 지저귀는 버드박스를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 우리의 연대는 조금 더 수월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바이러스와 전염병을 비롯한 모든 재앙과 위기는 우리를 고립시키고 있다는 자각과 어떤 상황이라도 인간에 대한 연민과 측은지심을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아치 드 베커(Archy de Berker) 박사 연구,
출처: 헬스코리아뉴스(http://www.hkn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