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쁜 일에 휘말리는가?

안정기피형 인간의 선택

by 스텔라

'오렌지이즈더뉴블랙'과 '셜록'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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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오렌지이즈더뉴블랙'의 주인공 파이퍼 채프먼은 10년 전 딱 한 번 저지른 죄로 15개월의 징역살이를 살게 된다. 채프먼은 금발의 아름다운 중산층 백인으로 교육 수준이 높고, 큰 경제적 어려움이나 별다른 고비 없이 순탄한 삶을 살고 있었다. 친구와 유기농 '목욕용품' 사업을 시작하기를 앞두었고, 자상하고 안정적인 성품의 약혼자와 결혼을 약속했다. 안정적이고 소소한 일상은 잘 작동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인생은 평탄하게 흘러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옛 애인이 복수심에 '마약자금 운반' 혐의로 채프먼을 밀고한 탓에 2년만 지나면 공소시효가 만료할만한 어린 날의 실수로 운나쁘게 모든 자유가 사라지게 된다.



1화 그가 교도소에 자진 입소 후 맞이하는 첫날을 보면 두려움과 불안감, 긴장과 우울함 그리고 억울함에 함께 슬퍼지고 그가 가엽기까지 하다. 채프먼은 교도소에 어울리지 않고, 다른 재소자들과는 확연히 분리된다. 어쩌다 이런 나락에 놓이게 된 거지? 교도소에서 옛 애인과 재회한 채프먼은 애인이 자신을 밀고한 사실을 알게 되자 걷잡을 수 없이 분노하고 원망한다. 애초에 그 범죄도 마약 조직의 중간 보스 격인 애인 '알렉스'와 함께 지내며 휘말린 일이었다. 그 범죄는 채프먼의 인생에서 극히 예외적이고 특수한 상황처럼 보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채프먼은 깨닫는다. 이곳의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지 않음을. 모두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책임지기 위해 이곳에 복역 중이란 사실을 말이다. 그들은 결코 그 일을 선택할 때 그것이 범죄임을 모르지 않았다(물론 예외는 항상 있다). 자신은 불운해서 이곳에 갇힌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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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생활을 통해 많은 일을 겪은 후 결국 채프먼은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어린 시절 시속 8km로 기어가는 버스에서 뛰어내리는 장난도 두려워서 치지 못할 만큼 기준과 규칙, 통제에 엄격해 보이는 자신은 일탈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평온한 일상을 견딜 수 없어한다. 그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삶에 진저리를 친다. 그래서 위험이자 자극 자신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알렉스에게 한눈에 끌렸고 만날 때마다 싸움과 혼돈의 연속이라도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알렉스가 없었더라도 그는 결코 그의 가족처럼 그의 주변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감옥을 가고 범죄자가 되고자 선택하진 않았지만, 무의식적인 그녀의 성향에 의한 선택의 합이 그녀 인생을 만들어갔다. 결코 무작위도 불운도 잠깐의 실수도 아니다. 교도소의 생활은 1년 6개월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그 사실은 영원히 그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그는 다시 결코 평범해질 수 없다. 그녀는 그런 인생을 택한 거다. 채프먼은 안정적인 삶을 상징하는 약혼자 대신 알렉스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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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많은 방면에서 네 인생을 만들어준 거 같아.
원래 넌 코네티컷 출신의 귀여운 금발 소녀였잖아.
스미스대에 다니면서 네 길을 가고 있었지 그 앞길이 훤히 보였어. 평탄하고 평범한 인생이

근데 마음 한구석에서 '좆 까'라고 외쳤어
'난 특별해질래'
알렉스가 그 특별함으로 가는 티켓이었고 흥미로운 삶을 살게 됐지 법 위에 있었어

그러다가 겁이 났고 다시 예전의 길로 돌아왔지
그리고 이런 삶이 네 눈 앞에 놓이기 시작했어 평탄하고 평범한 삶이
이번에 넌 이렇게 말했지 '어쩌겠어' '이제 지쳤어. 이대로 가자'
근데 내 생각에 그 특별함을 원하는 모습이 다시 나타났을 거 같아, 언젠가는

-오렌지이즈더뉴블랙 시즌7 13화, 래리의 대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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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드' 셜록의 단짝이자 조수 역할을 겸하는 동행인 '왓슨'도 마찬가지이다. 소시오패스 성향을 드러내는 셜록과 달리 온화한 성품과 조용한 심성을 지닌 것 같은 얌전해 보이는 왓슨도 누구 못지않게 자극이 필요한 사람이다. 어쩌다 우연히 셜록과 얽혀 운없이 범죄 현장을 누비며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게 아니라 그런 왓슨이기 때문에 셜록과 함께 하게 되었고, 셜록과의 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시즌 중간부에 자신의 부인인 '메리'의 정체가 CIA 요원이었음이 밝혀지자 왓슨은 절망한다. 대체 왜 내 주변에는 이런 이상한 인간들이 있는 거냐고. 그러나 셜록은 말한다. 자명한 결과라고, 왓슨은 평범하고 무난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수상한 사람, 잡히지 않는 사람, 복잡한 사람, 자신에게 자극을 줄 어딘가 다르고 비범한 사람들에게 끌리는 것이다. 왓슨은 반복적이고 무료한 일상에 소중함보다는 권태로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는 결코 무탈한 생을 보낼 수 없다. 무의식적으로 왓슨은 차라리 자신을 위험한 상황으로 내모는 모험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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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프먼과 왓슨은 안정기피형 인간이다. 일상과 안정감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어 일을 저지르거나 기꺼이 일에 동참하면서 에너지를 얻는 타입이다. 권태롭게 죽느니 차라리 위험하고 싶다. 그렇다고 전면에 나서서 무언가를 이끌거나 눈에 띄게 자신의 특별함을 과시하는 타입은 아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규범적인 인간상에 가깝다. 남들이 용인해줄 만한 소소한 일탈에는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이왕 위험 부담을 안을 거라면 뭔가 특별하고 큰 것을 원한다. 자주 일탈하지 않지만 완전히 삶을 뒤바꿀 변화를 원한다.


그들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모범적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그들에게 닥치는 불행하고 기이한 사고를 목격하면 억울하게 휘말린 불행한 피해자 혹은 어리석고 순진한 사람으로 비치기 쉽다. 그러나 실은 그들의 성향과 인생이 그렇다. 그들은 선택했고 향후 해도 높은 확률도 비슷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채프먼과 왓슨도 그렇듯이 안정기피형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자각하기 어렵다. 여러 번의 수상한 선택으로 고통을 맛보고 나서야 연결고리를 하나하나 맞춰나가며 그제야 그 모든 게 자신이 선택한 결과임을 깨닫게 된다.




누구보다도 착하고 손이 가지 않았던 말 잘 듣던 성숙하고 어른스러웠던 꼬마는 스무 살이 지나고 나서도 일탈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주로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담배도 술도 관심 없었고 눈앞에 마리화나와 시가를 펴볼 기회가 있지만, 유혹조차 느껴보질 못했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이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을 지향하고 변화와 위험을 기피하는 인간이라 생각했다.


인생을 돌아봤을 때 유독 선택을 잘못하는 사람 같았다. 아니 조금은 그저 무지했거나 너무 어렸기 때문에 어쩌다 일이 잘못 꼬여서 잘못된 선택을 우연히 한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들과 내가 비슷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깨닫게 된 순간 알았다. 나 역시 자극과 변화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다.



교육 분야가 싫어서 프로젝트 성과가 좀처럼 나질 않아 첫 회사를 그만둔 줄 알았다. 꿈도 없는 주제에 이유도 없이 절대 공무원만큼은 도전하고 싶지 않았다. 전 남자 친구가 취업 생각이 없어 헤어진 줄 알았다. 하필 알레라는 골치 아픈 사람을 우연히 만나 국경을 넘는 일에 휘말린 줄 알았다.



아니었다. 어떤 분야가 되었어도 심지어 관심 있고 열정을 갖고 있는 직무라도 안정적이고 평온한 일상이 계속되었으면 어딘가 공허한 마음을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안정적이기보다는 차라리 위험을 감수하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가 싫어진 이유는 그와의 일상이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고, 그와 계속 함께하면 내 삶이 변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레가 날 선택한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 아닌 '나'였기 때문에 완전히 내 삶을 뒤바꿔줄 알레에게 끌렸고 기꺼이 그의 위험한 모험에 동참하는 선택을 내가 한 것이었다.



그동안 완전히 몰랐다. 그게 모든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성향의 반영이었다는 것을. 내가 자극과 변화를 추구하고 일상적인 삶의 권태로움을 기피하는 인간이란 사실을. 지금의 삶은 내가 하나씩 차곡차곡 만들었다. 얼마간 평온한 일상이 지속되고 도저히 변화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 나는 자신을 파괴하거나 상대를 자극해서 이 삶을 산산조각 내려고 할지도 몰랐다.



아무 이유 없이 축 쳐지고 무기력하고 내일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지는 최근의 증상은 단순히 왔다가는 우울증이 아니었다. 심심해졌고 지겨워졌다는 신호였다. 나름대로 탐구하고 성찰하며 누구 못지않게 나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이런 중요한 특성을 이제야 깨닫게 되다니! 이런 류의 인간이 반복적이고 현상 유지 관리의 직무를 선택하면 당연히 파국을 맞는다. 삶에 지쳐 안정을 택했다가도 얼마 안 있어 슬슬 지루함에 미쳐버릴지도 모르니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거나 감당해도 괜찮을 시도를 해보며 인생에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파괴적인 성향이 있다고 자각하는 것만으로 조금 덜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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