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난 생각보단 괜찮았고, 넌 날 쉽다고 생각했다.

by 스텔라

남미의 장기 여행자라면 누구나 쿠바를 간다. 당연히 나도 쿠바에 갔다. 쿠바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아무 준비없이 쿠바에 갔다. 한 달 간 쿠바를 여행할 생각이었다.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적당한 기간이었다.


무얼 상상해도 기대 이상이라는 쿠바, 쿠바는 조금 특이하긴 했지만, '아바나(Havana, 쿠바의 수도)'의 일주일은 평온했다. 현금을 넉넉히 챙겨오지 않았다는 실수를 제외하면 말이다. 생각보다 여행자 물가는 비쌌고 나의 카드는 먹통이었다. 나태하게 일주일을 보낸 후, 충동적으로 재밌어 보이는 제2의 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로 떠났다.



알레를 만난 건 '산티아고 데 쿠바'에 도착한 첫 아침이었다.


날씨는 환상적이었다. 하늘은 파랗고 집들은 아름답고 대도시지만 아기자기하고 깔끔한 길거리. 사람들은 아바나보다 훨씬 친절했다. 나의 기분은 하늘로 솟아있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100원 정도의 수제 아이스크림을 먹고 행복 치사량에 달아 거리 사진을 마구마구 찍고 있었다.


그때 웬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게 알레였다. 그의 첫인상은 특별히 기억에 남진 않는다. 당시에는 쿠바 사람들이 어떤지에 대해서 정보가 전혀 없었기에 그가 조금 다르다는 걸 몰랐다. 다만 '안녕! 난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남자의 의중이 궁금했을 뿐. 나는 아주 버릇없게도 그의 호의적인 인사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나는 돈이 없어. 나는 영어로 말 거는 사람들은 아주 싫어해. 그들은 내 돈을 노리거든. 그런데 난 진짜 돈이 없어. (문법 하나도 안 맞는 초 단순 스페인어)"


"무슨 소리야. 난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다니깐. 원한다면 스페인어로 말해줄게."


"미안하지만 난 스페인어 못 알아들어. 돈 없다고."


끈질기게 내게 이야기하자는 그는 날 대접하겠다며 테이블이 있는 슈퍼 같기도 하고 카페 같기도 한 야외 테이블 그늘 한구석으로 날 데려갔다. 난 사이다 비슷한 걸 시켰고 당연히 그에게 얻어먹을 생각은 없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기에 날 데려왔을까? 이 남자의 목적이 뭘 까?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식상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형식적이고 영혼이 무 첨가된 형편 없는 대화가 그럭저럭 이어졌다. 심지어 너무 지루해 슬리퍼를 벗고 의자 위에 발을 올려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대체 날 부른 이유가 뭐지? 알 수 없는 놈이다.


슬슬 집에 가려고 웨이터님에게 얼마냐고 물었으나 이미 계산은 끝나 있었다. 그는 그 순간 입고리를 올려웃고 있었다. 가난한 쿠바인에게 얻어먹고 입을 씻고 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다음은 내가 사고 빨리 이 빚을 청산해야지. 그는 많이 해본 듯 '노래 들으러 갈래?'- 다음 코스를 권유했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가 데려간 곳은 'Trova Tradicional Cubana!' 그 장소는 누구라도 무척 흥미로운 음악 바였다. '산티아고 데 쿠바'는 음악으로 유명하다. 마치 '부에나 소셜 클럽'에서 나올 법한 경쾌한 라이브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사람들은 살사를 추고 있었다. 관객들은 나무 의자에 옹기종기 앉아있다. 박수도 치고 리듬도 타고. 그렇다. 나는 단순한 인간이다. 그 남자의 의도는 이제 상관할 바 아니었고 분위기와 음악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이곳을 소개해준 그에게 고마움도 느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맥주 한 캔을 사서 그에게 내밀었다. 고맙기도 하고 얻어먹은 것도 있으니 나로서는 당연했다. 그는 뭔가 조금 감동한듯한 얼굴로 절대 내가 꺼내지 않았으면 하는 말을 꺼냈다.


"춤출래?"


절대 싫다고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 어느새 나는 그의 리드에 따라 스텝을 억지로 밟고 있었고 그 꼴은 아마 목각인형 같았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노'라는 말을 튕겨내는 자체 필터가 귀에 장착되어 있다. 제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독재자 타입. 나의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흐르고 그 끔찍한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다행히 그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음악을 듣고 기분이 한껏 고취된 나는 어느덧 그의 다음 코스도 저항없이 따라간다. 그곳은 LP판을 틀어주는 분위기가 끝장나는 바였다. '쿠바는 모히또가 유명하지.' 그는 내게 한 잔을 권하고 자기도 한 잔 마신다. '옳지! 이 녀석, 본색을 드러내시지.' 나는 순순히 덫을 노는 사냥꾼처럼 모히또 가격을 계산했다. (3 CUC짜리 음료수를 6~10 CUC으로 팔아먹은 뒤 나머지 커미션을 챙기는 사기는 쿠바에서 일상이다) 모히토 가격은 정상적이었다.


...나는 좀 김이 빠졌다. '얘 뭐지...?' 술도 한 잔 취했고 음악도 좋고 내 마음이 어느새 몽글몽글해졌다. 얼굴이 시뻘게지자 그는 테라스로 의자 두 개를 끌어와서 내게 앉으라고 권했다. 음악을 한참 들으며 평화로운 거리를 바라본다.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었다.


"키스해도 돼?"

"왜?"

"그냥 하고 싶으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가 어려운 일도 아니고 분위기에 취하기도 했고 키스타임 같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얜 생각보다 키스가 참 별로구나.'


별거 없는 그 키스를 끝내고 술에 더 취하면 길바닥에서 드러누울 것 같아서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내일도 만나자. 12시에 광장으로 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의도는 모르겠지만 좋은 곳을 소개해주었고 딱히 내 돈을 노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같이 있어 나쁘지 않았던 아니 즐거웠던 하루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그만 만나면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생각보다 싱거웠다. 알레와의 첫 만남은.. 그냥 기억에 남는 거 없이 평범했다.





알레는 '산티아고 데 쿠바'가 고향이다. 원래는 '아바나'에서 살았는데 내가 '산티아고 데 쿠바'를 가기 일주일 전쯤 '아바나'에서 추방당했다고 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첫날 그는 끈덕지게 이야기하자고 졸랐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간절해 보였던 말투와 달리 그 답은 너무 심심해서라고.


원래 인터넷을 쓰러 가는 길이었는데 (그 당시 쿠바 인터넷은 제한된 공간에서 한 시간에 4~6천 원을 내고 아주 느린 속도로 정부 감시를 받는 서버의 메일을 써야만 했다) 마침 그 공간이 문이 닫혀 할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머리를 노랗게 염색했고 그는 내 뒷모습을 보며 서양인으로 착각했다. (그는 동양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한국인) 내가 뒤돌아본 순간 그는 고민했다고 한다. '아씨 그냥 갈까... 한국인 같잖아.' 그때 그 안에 목소리가 외쳤다. '신경 쓰지마. 그냥 말을 걸어!'


단지 우연 몇 개가 겹치고 심심하다는 원초적인 이유로 평소 좋아하지도 않는 동양인에게 끈덕지게 말을 걸었을 뿐인데 호기심 많은 내가 걸려들었다. 그도 내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이상한 야외 테이블에서 내가 발을 올린 순간 그 발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평소 나는 발이 콤플렉스여서 양말을 벗지도 않는다. 우리 오빠는 내 발을 낙하산이라고 놀렸다. 쿠바에서 거지꼴이었다. (난 큰 짐 없이 작은 배낭과 에코백 하나 들고 마실 오듯 쿠바를 왔다. 초고속으로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나를 보며 비행기에서 만난 한국인 모녀는 그게 짐이 다냐고 물었다.) 여행 동안 모든 걸 내려놓았기 때문에 발 정도 보여주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쿠바 사람들은 발에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데 잘 씻기고 컴플렉스를 가리기위해 바른 매니큐어를 보며 '발관리를 참 잘했다. 얘는 전신이 참 깨끗하겠다.'는 이상한 매력을 느끼셨단다. 이상한 발 페티쉬다. 그때부터 내가 예뻐 보였다고 한다.


특히, 'Trova Tradicional Cubana'에서 맥주를 건넨 순간 감동받아 날 관광하게 해주리라 결심했다고. 자기가 무얼 사달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알아서 맥주를 바치는 관광객은 처음 봤다고 했다. 아마도 자기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는 내 진심을 본 것 같다. 난 쿠바에 관해 일도 몰라 왜 그가 그렇게 감동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쿠바에서는 사기꾼 수 못지않게 쿠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이용하다 떠나버리는 관광객 수도 아주 많았다는 걸.


'그냥 빚을 지기 싫어 맥주를 사줬을 뿐인데..'


그렇게 몇 번의 우연들과 사소한 접점들이 만나 우리의 만남은 이어지게 되었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그때 넌 키스를 하지 말았어야 해. 네가 하고 싶지 않다고 했으면 난 키스하지 않았을 거야."


그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하지만 키스하고 싶단 말도 진심이었다고 했다. 망할 놈. 거의 헤어진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에겐 그냥 남자친구가 있다고만 말했다.


그의 입장에선 내 사랑이 정말 가벼워 보였을 것이고 '이 여자 또한 그냥 항상 보던 그런 여자들과 비슷하구나. 즐겨야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랬다. 그는 날 쉬운 여자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상처받을까 봐 '네 키스는 정말 별로야.'라는 말을 입 밖으로 뱉지 못한 게 후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