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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Kim Jul 25. 2019

일상의 증인, 나의 집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을 읽고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이야기하는 건축.

 

사랑, 여행, 문학, 철학, 불안. 다양한 영역에서 명쾌하고 통찰어린 글쓰기를 해왔던 드 보통이 건축을 이야기한다. 우리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공간, 그 공간을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답게 구현해내는 건축을 놓고 드 보통은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까?

 

건축가가 화자로 등장하는 드 보통의 다른 책을 읽으며 이 사람 원래 건축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건축가의 삶과 일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드 보통은 글쓰기를 건축에 비유하기도 했고, "살아있는 건축(Living Architecture)" 이라는 참신한 건축을 추구하는 단체의 창립 구성원이기도 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드 보통은 '사람이란 절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고 말한다. 사람 사이 사랑과 미움의 바탕에는 주관적이고, 어쩌면 환상적인 요소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행복의 건축"은 인간과 건축 사이에도 사랑과 같은 요소가 있다고 시사한다. 드 보통은 건축이 도시를 아름답게 하고, 그 속에 사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여 안정한 세상을 만든다고 믿는다. 아니 그런 꿈을 꾼다.

 

집은 물리적인 형태를 넘은 심리적인 성소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방문하면 그 사람의 여러가지 면모를 짧은 시간에 파악할 수 있다. 집은 거주자의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알려줄 뿐 아니라, 그 사람의 규율, 취향, 성향, 세세한 버릇까지도 낱낱이 기록하기 때문이다. 집은 거주자들을 품으며 같이 나이 들어가는 살아있는 생명체다. 드 보통은 집이 병을 치료하진 않지만 행복의 증거를 보여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드 보통은 세속의 아름다움을 경계한 스토아학파 철학자와 중세 금욕주의자들을 소환하고, 인간이 건축물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면 눈을 돌릴 때마다 괴로울 수 밖에 없으니 아름다움에 대해 마음을 닫아야 하며, 프로이트와 릴케의 대화를 통해 완성과 동시에 소멸이 시작되는 건축물의 숙명을 안다면 사라져 버릴 것들에 대해 마음을 접으라고 이야기하고, 건축물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항상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도 없고 인간을 더 올바르게 하지도 못한다고 비판하고, 삶의 고단하고 슬플 때 비로소 건축물이 주는 행복은 결코 일상적일 수 없는 행복이란 점을 깨닫고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면서 "건축물이 아름다울 필요가 있나"라며 탄식을 하더니 갑작스럽게 "그렇다면 아름다운 건축물이 뭔지는 아느냐"며 나의 무지를 공격한다.   

 

건축물의 아름다움은 우선 스타일로 드러난다. 고대 그리스인이 만들어낸 고전 스타일은 러시아에서 스페인까지 핀란드에서 이탈리아까지 공존했다. 고전 스타일은 건축물의 외관뿐만 아니라 각종 장식물, 실내 구조, 창문까지 규정했고 전 유럽 도시에 일관성을 부여했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미학적 언어가 결국 에든버러 회계사나 필라델피아 변호사가 사는 집까지 꾸며주게 된 것이다.' 18세기, 건축주들이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다양한 스타일로 집을 짓게 되었다. 신을 향한 염원을 첨탑으로 표현한 고딕 스타일이 유행을 타더니 모든 스타일이 뒤섞이는 혼돈의 시대에 접어 들면서 스타일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 논쟁에 답을 낸 사람들은 건축가가 아니라 산업혁명을 주도한 엔지니어들이었다. 기능을 아름다움으로 바꾸는 일이 의무라고 생각했던 건축가들과 가장 효율적으로 최고의 효과를 뽑아내는 엔지니어는 태생부터 달랐다. 엔지니어에게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 기둥, 석상, 조각 따위는 거짓이고 부도덕한 존재였다. 그 정점에는 모더니즘과 르 코르뷔지에가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비행기에 기능과 무관한 장식을 달면 추락하듯이 집에 기능과 무관한 것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 기능성을 그토록 강조한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부아는 집은 비가 샜다! 기능때문이라고 강변했지만 사실은 보기 좋아서 선택했던 평평한 지붕때문에 집은 기본 기능을 다 하지 못했다. 모더니즘의 이중성은 집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심리적 성소가 되어야 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추상 미술 작품을 보면서 감동을 느낄 수 있다면 절제되고 단순한 건물에서도 감동을 느껴야 한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주장했듯이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고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믿고 의미를 숭배하도록 할 수 있다. 세상 만물이 자신에게 이야기를 건낸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종이 자신을 감싼 집이라는 공간이 침묵하리라 생각할 리가 없다. 드 보통은 건물이 해주는 이야기를 번역할 수 있는 사전을 제안한다. 건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스타일, 재료, 크기, 모양 등이 인간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정리한 사전 이야기는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패턴 언어'와 맞닿아 있다. 알렉산더는 건축물들이 주는 좋은 느낌들에 주목했고 그 이유를 정리했다. 예를 들면 '두 면에서 자연 채광이 이루어지는 방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와 같은 패턴을 발견했다. 드 보통은 구성요소가 건내는 이야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전체 건물이 왜 아름답게 이야기를 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아름다운 건물은 우리가 귀중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상찬한다. 스탈당이 말한 것처럼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기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좋은 삶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서로 얽혀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꽤나 복잡하고 미묘한 존재이기에 우리의 다양한 목표를 '행복'이란 말로 뭉뜽그릴 수 밖에 없고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이 다양하듯 아름다움도 다양할 수 밖에 없다. 아름다운 건축물은 개인의 이상이 물질로 변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집이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중요한가? 드 보통은 집은 심리적 틀이 되어 우리를 지탱하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유지해 주는 장소이며, 우리의 전망에 부합되고 또 그것을 정당화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 모든 것이 우리를 배반해도 우리를 지켜줄 피난처가 집이며, 종교는 집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인간은 건축물을 통해 믿음을 계속 확인받고 싶어 한다. 아름다운 건물은 인간을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개선하는 힘을 가지며 이는 시각 영역과 윤리 영역이 동등하다는 인간의 믿음에 기초한다고 드 보통은 설명한다. 따라서, 세속적이든 종교적이든 건축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을 옹호하는 자들은 어떤 공간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행복이 달라지고 건축물의 구성요소들과 장식들은 우리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추구하는 상태를 돕는다. 종교적 건축물 안에서 우리가 신을 기억하듯 개인적 건축물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기억한다. 세상이 잘 모르고 우리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일관되게 제공하는 곳이 집이다. 집은 나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나와 가장 접촉이 많은 물건들과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저장한다. 손이 많이 닿아서 반들반들해진 손잡이라던가 무거운 물건을 떨어뜨려 깨진 바닥 타일이라던가 휴일을 보내며 나른한 햇볕을 쬐는 베란다 한 구석 나만의 공간이라던가, 집은 언어로는 기록할 수 없는 무언가로 나를 기록하고 나를 알리고 싶은 욕망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 우리의 이상을 투영한다. 똑같은 구조가 켜켜이 쌓인 곳에 층만 달리하며 사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집에 자신을 투영하며 시간을 쌓아가는지 보여준 라야의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을 보라. 인간의 이상이 집에 어떻게 저장되는지 제일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 대한민국의 아파트다. 주거지에 저장된 개인의 이상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공건축물과 더 나아가 도시까지 확장된다. 세상 모든 건축물은 인간의 이상이 저장된 결과이다. 인간이 변하듯 이상도 변하고 건축물이 담아내는 아름다움도 변한다. 드 보통은 보링거를 끌여들여 추상성과 사실성의 불균형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변하고 건축가와 거주자의 취향이 이러한 태도에 반영되기에 변화는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대다수가 아름답다고 공감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아름다운 도시를 이야기하라고 할 때 프랑크푸르트나 모가디슈(소말리아 수도)를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많은 건축가들이 건축물을 아름답다고 여기게 하는 뭔가를 찾으려 애를 썼지만 실패했다. 법칙을 따른다고 해서 모두 아름답지 않았고 법칙을 철저히 어겼지만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드 보통은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정의하는 일반 규칙보다는 어떤 사람의 뛰어남을 여러가지 미덕의 절묘한 조화로 설명하듯 건축물의 아름다움도 질서, 균형, 우아, 일치라는 미덕들의 조화로 설명하려고 한다. 또, 파리를 따분한 수용소처럼 만들려고 했던 르 코르뷔지에의 구상에 경악한다. 요란한 건축가들을 경계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캐묻고 기쁨을 찾아 끈기있게 설계에 반영하여 의식하지 못했던 요구까지 충족시키는 건축가들을 찬양한다.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르 코르뷔지에의 구상과 많이 닮았지만 한국인의 감춰진 욕망을 절묘하게 구현하였고 그 결과 한국에서 제일 사랑받는 주거 공간이 되었고 미묘한 아름다움까지 느끼게 한다. 건축물이 주는 아름다움이란 형식 문제가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지역 어느 욕망을 충족하는 문제다.

 

드 보통의 관심은 도시까지 확장된다. 도시 주변 들판은 어느날 건축물이 지어질 운명을 부여 받는다. 원래 있던 자연보다 나는 건축물을 짓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성모독에 가까운 행위지만 우리는 수동적으로 체념하며 건축물이 지어짐을 받아들인다. 아주 사소한 이유로 들판은 망한 건축물로 채워지기도 하고 비슷하게 세상에 없던 뛰어난 건축물로 채워지기도 한다. 모든 건물에는 사람들의 의지가 담겨 있고 들판은 그 의지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세상 모든 들판은 행복을 담아낼 수 있다.

 

드 보통의 평소 글세계인 나를 넘은 우리의 시선을 보는 건축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다.  

 

드 보통의 견해 중 자아의 실종이란 결국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잃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막아주는 요소로서의 건축은 때론 혁명적 공간 배치로 가능 하다는 부분에선 어떤 희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건축은 건축으로의 생을 가지고 있다. 마치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속성을 지니고 있듯이. 


그리고 건축은 인간을 보다 행복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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