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카메라 속 롤 세 개를 인화한 날
이전 필카에 관련된 글을 쓴 적이 있다. 지인들을 딸 필카를 찍었는데 필름 카메라의 찍히는 감성에 흠뻑 빠졌었다. 우리 집에도 이삿짐을 정리하다 보니 집에 필카, 디카가 있었다. 합해서 세 네대였던가? 만질 줄을 몰라서 보다가 우연히 세, 네대의 카메라 중 하나에 필름이 꽂혀 있는 걸 보았다. 나는 필카를 잘 아는 동생에게 부탁해 집에 엄마가 쓰던 필카들이 있어 살릴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로 했다. 또 감겨있던 필카 롤이 현상이 되는지 궁금해 함께 현상하기로 했다. 겸사겸사 바람도 쐴 겸 동생 얼굴도 볼 겸 해서 가게 된 곳은 을지로 4가, 청계천이 있는 곳이었다. 2월 중에서도 날이 풀리지 않아 추워 두툼한 패딩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동생이 잘 다니는 현상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확히 세 대중에 올림포스 필름 카메라 한대를 살릴 수 있었다. 사장님께 건전지를 구입해서 바로 카메라가 실행이 되는지 확인해 보았다.
필름 카메라는 현상하기 전까지 모른다. 마치 동전으로 즉석복권을 긁는 것처럼 기다리는 묘미가 있다. 바쁜 일상에서 바로바로 찍힌 사진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다. 그래서 알 수 없었다. 엄마의 카메라에 들어있는 롤, 그러니까 필름이 현상이 잘 될지는. 어쩌면 아무것도 인화가 안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한 장이라도 엄마의 모습, 혹은 지난날의 모습을 건지고 싶어서 인화를 신청했다. 사진을 뽑아내는 데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우리는 청계천 주변을 거닐며 강에 앉은 청둥오리며, 아직 날씨가 추워 바위에 붙어있는 얼음 등 소소한 풍경들을 찍기 시작했다.
엄마의 카메라는 자동 필카였다. 수동 필카와는 다른 맛이지만 엄마가 이 카메라로 어린 시절 나를, 아빠를 또 놀러 다닐 때마다 찍어줬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초점이 맞는 건지 내가 잘 찍는 건지 알 수 없다고 동생에게 말했다. 그러자 동생은 원래 그런 느낌으로 찍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도대체 무얼 찍는거냐며 아무거나 막 찍지 말라는 잔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인화된 사진을 보고 '꽤 느낌 있게 찍는다'며 칭찬을 받았다. '사실 내가 아무거나 찍은 건 아니고, 다 계획이 있었단다' 어깨에 힘을 주며 사진 찍는 게 꽤 재밌어졌다.
내가 잘 찍었다니 보다는 엄마의 카메라가 대부분의 일을 한 것 같다. 그리고 필카도 종류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건 파노라마 필카, 가로길이가 더 길어서 길쭉하게 나오는데 정사각형 직사각형의 느낌과는 또 다른 멋을 가지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인화된 롤에서는 보라색 파란색 빛깔로 정말 오래돼서 알 수 없는 형상들의 사진이 있었다. 시간이 꽤 오래 지났으니 안 나왔겠구나 싶었는데 두 번째 롤은 내 어릴 적, 그러니까 엄마, 아빠의 젊은 시절이 올곧이 담겨 있었다. 엄마의 독사진부터, 아빠가 바다를 거니는 사진, 사촌동생과 놀이기구를 타는 사진 등. 내가 유치원, 초등학생 때쯤의 모습을 보다 보니 십여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엄마는 이런 걸 찍었구나'
아빠의 모습, 내 모습, 정작 남들을 찍어주느라 엄마의 독사진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 장 남은 거라도 다행이지 싶었다. 필름은 인화할 때까지의 나를 기다려 준 것 같았다. 엄마의 카메라는 마치 가보가 된 것 같았다. 엄마의 성격처럼 깔끔하게 사용한 흔적이 엄마의 모습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나는 몇십 년이 지나도 잘 되는 필카를 나는 다시 한번 꾹 쥐어 보았다. 훗날 내가 사용하고, 내 자식이 사용하고, 새로운 누군가를 찍어주면서 엄마가 다른 이를 찍어줄 마음을 나도 느껴볼 수 있을까.
엄마의 젊은 시절을 보며, 예쁘다, 잘 나왔다, 잘 담겼다라고 읊조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