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된장으로 엄마가 만들어주던 그 맛
'엄마 맛있는 거 해줘' '야 지금 네 나이면 시집가서 애도 낳고 엄마는 할머니로 불릴 나이야' 회사를 다녀온 내가 엄마에게 배고프다고 찡얼 대면 엄마는 네 나이가 몇개냐며 음식도 할 줄 알아야 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그때는 못하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할 줄 아는 게 많아질 줄이야. 진작 좀 할걸이라며 후회한다.
이제 부엌은 오롯이 내 공간이 된 지 오래다. 그동안 서른 살이 넘은 나이였지만 요리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내가 칼질을 하고 채소를 다듬고 다진 양념을 만들고 국물을 떠먹으며 간을 본다. 엄마의 음식 중 단연 최고는 된장찌개였다. 코로나 확진자로 재택치료를 하며 밑반찬을 만들고, 요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느 날처럼 멸치볶음을 하고 몇 가지 무침을 만들었다. 문득 된장찌개가 먹고 싶었다. 나는 감자와 양파를 손질하고 육수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고 있었다. 된장을 찾고 있던 찰나, 아빠가 베란다에 있는 작은 독 하나를 가리킨다. 딱 봐도 만든 된장인데 시간이 오래 지난 것처럼 보이는 향이 구수하게 올라왔다.
"아빠 이거 뭐야? 언제 담은 된장이야?"
"네 외할머니가 담근 건데 이걸로 된장찌개 많이 해 먹었어"
어렸을 때는 된장이며 고추장 김치를 외할머니가 손수 만들어주셨다. 마치 이 된장이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손길이 들어간 유품 같은 느낌이었다. 항상 손자, 손녀, 딸자식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뿌듯해하셨는데 할머니가 만든 것이라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된장 두 큰 술 정도를 퍼 국물을 냈다. 고소하면서 은은하게 퍼지는 정겨운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잘 익은 감자와 양파 채소들 사이로 썰은 두부를 넣었다. 된장찌개의 피날레인 셈이다. 아빠는 내가 만든 음식들을 보며 '장하다, 많이 컸다'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엄마가 네가 만든 거 보면 좋아할 텐데, 너 다 컸네'
나는 울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으며 수저로 된장찌개 국물 맛을 보았다. 그런데 이 맛은 신기하게도 엄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 맛과 똑같았다.
"아빠 내가 끓인 된장찌개에서 엄마가 끓여준 맛이나"
엄마가 끓이던 된장찌개의 육수의 비밀은 할머니 된장이었다. 외할머니의 된장으로 만든 엄마표 된장찌개는 늘 내가 먹던 맛과 똑같았다. 그런데 이 맛이 내가 끓인 된장찌개에서 나다니. 나는 한참 동안 멍한 상태로 끓는 된장찌개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된장찌개를 먹으며 할머니와 엄마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엄마는 항상 일하러 나가기 전 나보다 한두 시간 일찍 일어났다. 부엌에서는 무언가 다지는 소리가 났었는데 채소를 손질하고 반찬을 만들었을 것이다. 부엌에서 엄마의 잔상이 잠깐 보였다 스치듯 사라진다. 다른 건 몰라도 밥은 챙겨 먹으라던 엄마가 떠올랐다.
된장국을 먹으며 청승맞게 눈물을 삼켰다. 할머니가 남긴 오래 묵어 삭은 된장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방 안에서 조용히 울었다. 된장국에는 할머니의 시간과 엄마의 기억이 내 된장찌개에서 나와 엄마가 해주던 맛과 같아 기뻤다. 할머니의 된장독에 남아있는 된장을 보며 아껴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만든 된장국은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엄마와 할머니의 시간이자 기억일 것이다. 나는 된장독을 바라보며 남은 된장의 양을 가늠했다. 그리고 저 된장독이 비지 않도록 최대한 아껴먹으리라 다짐했다. 휴대폰에도 가족사진 한 장 남아있는 기억을 된장에서 발견했다. 슬프지만 기뻤다. 엄마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게 엄마가 생각나면 된장국을 끓여먹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