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라일락 Apr 01. 2022

오랜만에 이북리더기를 펴다

책은 또 다른 기억을 건져 올린다

  이북리더기를 켰다. 막상 키려고 하니 방전이 되어 'NO POWER'라고 적혀있는 글씨만 보였다. 집에 있는 책장에 켜켜이 쌓여있는 책들은 거의 다 읽어서 나는 가끔 이북(E-book)으로 책을 대여해서 읽곤 한다.

  이사를 오고 처음으로 이북 리더기를 킨 셈이다. 몇 개월째 일자리가 구해지지 않아 면접 잘 보는 법, 말 잘하는 법 등을 구매해 읽곤 했으니까.  오늘처럼 편안하게 책을 읽은 날은 처음이었다. 처음 이북 리더기를 산 이유는 편리함도 있었겠지만 소위 말해 '있어 보여서' 산 것이었다. 참되지도 않는 웃긴 이유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 공공장소에서 스마트폰만 보기도 그렇고 틈새 시간에 유익한 걸 하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 하다가 이북리더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 한 직장인을 본 적이 있다.


  트렌치코트에 서류가방을 든 사람,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지적인 기운 속에는 손에 든 '이북 리더기'가 있었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지르고야 마는 성격의 나는 단숨에 YES24서점에서 파는 크레마 사운드라는 리더기와 커버를 사고야 말았다. 화면 한 공간에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대기화면도 지정할 수 있어서 처음에는 화면 설정하느라 시간이 다 갔다. 괜히 스마트폰이 하나 더 생긴 것 같기도 해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호기심도 잠시, 책을 많이 읽을 줄 알았으나 이북리더기에 대한 관심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러다 내가 얼마 전 정신을 차린 것은 꽤 큰 면접에 낙방하면서였다. 당시 1차 면접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었다.

  "이 정도 수상과 경력이면 책도 아주 많이 읽었겠네요"

  나는 그 말이 곧 책은 얼마나 읽느냐라고 받아들였지만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백수인 지금, 이제껏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미소를 띠며 "많이 쓰는 편입니다"라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허나 많이 쓰려면 읽어야 나오는 것이 아닐까. 면접을 보고 한동안 내 독서량에 대해 생각했다.


  스케이트 선수가 트랙 수십 바퀴를 돌기 위해 하루 종일 운동을 하는 것과 같이. 쓰려는 사람은 무조건, 뭐든 읽었어야 했다. 매번 내가 글이란 것을 잘 쓸 수 있을까를 탓하는 건 그냥 자기 합리화일 뿐이었다.

  나는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과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를 빌려 이북리더기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베란다 너머 바깥을 보니 잠깐의 비가 땅을 젖었는지 풍경들이 축축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소설을 보는 내내 집중하다가도 키득거리다가도 괜찮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책은 내 기억 속 꼬리에 꼬리를 물어와 아주 끝에 있는 경험들을 데리고 왔다. 책이란 그런 마법이 있나 보다.

  다음날 나는 다시 이북 리더기를 켰다. 오늘부터 심연 속에 잠겨있는 내 기억들을 끌어올릴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웨이팅을 잘하는 사람은 나와 무엇이 다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