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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Apr 08. 2022

느리게 달리는 법

인생은 긴 마라톤, 나는 계속 달린다.

  내가 학생이었을 당시 운동회가 열릴 때마다 1등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었다. 일등을 해 학용품을 부상으로 줘서가 아니라 '1'이라는 타이틀이 붙는 것이 그저 부러웠다. 그래서 나는 체력장을 할 때 죽자살자 뛰어서 오래 달리기만큼은 최소 시간으로 달렸었다. 남들보다 시작은 느렸지만 꾸준하게. 끝까지 호흡을 유지하며 달리다 보면 먼저 뛰어가던 옆 짝꿍이 뒤쳐져 헉헉거렸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순간순간이 빨라야 했다. 지각하지 않기 위해서. 데드라인에 맞춰 빠르게 보고서를 제출해야 돼서.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인생의 달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느리게 달린다는 말은 참 모순적이다. 사람이 어떻게 느리게 달릴 수 있을까? 게다가 나는 남들보다 이해하는 속도나 나아가는 방향이 느린 편이다. 학창 시절 한번 본 내용을 스캔하듯 머리에 복사해 시험문제를 풀던 친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나 나는 그와 반대였다. 같은 내용을 연필로 여러 번 깜지 하듯 써 내려가야 겨우 단어, 키워드 등이 기억났다. 그래서였을까 학창 시절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 내신성적은 마의 구십 점을 넘긴 적이 없었다.

  대신 내겐 남들에게는 없는 쓸데없는 기억 주머니가 있다. 어린 시절 하나하나 무엇을 했는지 에피소드들을 기억해 내는 능력, 남들이 했던 말들을 캐치하는 능력, 이런 쓸데없는 기억은 꽤 요긴하게 쓰인다. 

'몇십 년이 지난 학창 시절 기억들도 다 나니까, 어느 계절 이맘때쯤 그때 그랬잖아.'라고 말하면 친구들은 '너는 뭘 그런 걸 일일이 다 기억하냐'며 웃어댄다. 


꼬리의 꼬리를 문 추억들은 느리게 행진한다. 입에서 입으로 내 추억들이 전달된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꽤 빠르다고 느껴지는 것은 상대적이긴 하지만 아마도 같은 일을 반복해서가 아닐까. 일이 바쁜 어느 날은 시계를 보지 않아도 알아서 시간이 지나가 있다. 혹은 아이 육아를 하거나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워킹맘의 경우 체감적으로 더 빠르게 시간이 흘러간다고 느끼겠지. 

  나는 그럴수록 느리게 걸어가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 나는 쉬면서 느긋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이름하여 '느리게 달리기' 쫓기듯 밥을 먹고 무언가가 따라오기라도 하듯이 조바심을 내지 않으려 한다. 빨리 뛰어가지 않고 느리게 뛰되 정확히 걸어가려고 한다. 물론 다시 일자리를 구하면 적응하는 기간도 있으니 바빠지겠지만. 그전까지는 마음의 공백을 마련해 두기로 한다. 너무 빨리 뛰어 내 마음이 체하지 않도록 뒤도 돌아보고 걸어가며 떨어진 돌이나 잎새들도 만지작 거리며 꼭꼭 씹으며 씩씩하게 걸어갈 것이다. 

  날씨가 꽤 따뜻해졌다. 나는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해 한강 산책로에 발을 내디뎠다. 걸어가는 길목마다 그림자가 진다. 내가 살아 있음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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