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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기다림을 타고 간다

펜을 꾹꾹 눌러 감정을 담는 법

by 최물결

'아빠 오늘 OOO 다녀옵니다. 문단속 잘하고 있으세요'

나는 아침잠이 많아 몸을 이불에 묻으며 잠투정을 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가끔 메모로 외출을 알린다. 나도 아빠와 똑같이 나갈 때마다 종이에 메시지를 써 티브이 옆 선반에 놔둔다. 주 내용은 강아지 약은 먹였다. 약은 주지 않아도 된다, 혹은 사료는 아직이니 사료를 먹여주세요라는 내용 정도다. 말보다는 종이 위에 펜으로 적는 것이 우리 부녀한테는 좀 더 자연스럽다.

문득 며칠 전 이삿짐 꾸러미를 정리하다 찾은 엽서며 편지들 생각이 났다. 편지는 기다림과 설렘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어릴 적 초등학생 때에는 오색 펜을 일주일 안에 다 쓸 만큼 글을 많이도 썼다. 글이라 하면 편지며, 교환일기 같은 것이다. 묵은 이삿짐 속 고이 간직해두었던 편지봉투들이 마치 우리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 같다. 이렇게 편지가 생각난 이유는 얼마 전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후부터다.


집에서 홈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스텝퍼를 밟을 때 시선은 앞으로 가 있고 발은 쉼 없이 움직인다. 이대로 삼십 분가량 견디려면 뭐든 틀어서 봐야 했다. 순간 한 채널에서 리모컨을 멈췄다. 영화 이름은 '비와 당신의 이야기' 강하늘 씨와 천우희 씨가 주인공인 영화다. 영화의 대사도 듣지 않고 시선을 고정한 이유는, 책방, 편지, 우체통, 천천히 돌아가는 LP 등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배우들의 표정이 일상적이고 담담해서였다. 사실 내용은 이렇다 하게 자극적이지도 극적이지도 않다. 주인공 영호와 소연은 편지를 통해 위안과 위로를 받는다. 또 그 안에서(편지 속)에서 약속을 하기도 한다. 요즘에는 볼 수 없는 순수하고 수수해서 맑다 라는 느낌을 자아내는 영화였다. 편지라는 소재를 보다 보니 내 기억의 한 모퉁이 속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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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사촌동생 집에 가곤 했었다. 형제가 없어 심심한 이유도 있었고, 사촌동생이 세명이라 함께 놀 때면 정말 즐거웠으니까. 일주일, 칠일이라는 시간이 기다리기 힘들어 편지지와 펜을 들고 책상 앞에 앉곤 했었다. 'OO아 다음엔 뭐하고 놀자'라는 계획과 포부를 한껏 적어서. 답장이 없는 일방적인 편지여도 내 이야기와 감적을 적는 것이 그저 좋았었다.

지금은 줄 공책에 아침마다 브런치를 쓴다. 한번 더 데스크톱을 통해 옮겨야 하지만 글로 직접 쓸 때 올라오는 감정들이 진짜 나 같아서 '수기로 글 쓰는 것'을 고집한다. 지금 이 브런치에 수신인이 없지만 글을 쓸 때면 불특정 다수인 어떤 공간에 내 글을 툭 날려 보낸다고 생각한다. 이 글들이 모여 여러 페이지가 되고 한 권의 이야기가 될 생각에 벌써부터 설렌다. 가끔 아주 가끔 내 이야기를 보고, 누군가는 위안을 받기도 공감과 격려를 얻는다는 피드백을 들을 때면 괜히 한 게 아니구나 하고 힘이 나니까.

브런치도 일종의 편지라고 생각하며 글을 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머릿속에 지나간 이야기를 펜으로 옮긴다. 수신인 없는 이 글을 한 명이라도 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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